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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에 대항하려던 국제사회의 시도는 빙하기라는 결과물로 되돌아오게 되고, 그 빙하기 와중에 '공전주기'가 1년인 열차만이 얼마간의 사람을 싣고 마치 위성과 같이 지구를 달려나가게 된다. 또 다른 생태계나 마찬가지인 그곳에서는 또다른 계급이나 마찬가지인 구분들로 사람들이 나뉘어 있고, 가장 하층민으로 핍박받고 살고 있는 꼬리칸 사람들은 다시한번 판도를 뒤집을 혁명 혹은 반란을 준비 중이다...> 



이 정도가 설국열차의 간략한 줄거리 되겠다. '국인이라면 이 화 응원해 줍시다' 3연작 시리즈의 대망의 마침표를 찍는 작품이자 어마어마한 제작비와 어마어마한 캐스팅이 봉준호라는 상품성에 더해져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기대를 불러 모았던 작품. 그러나 거꾸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최우선의 강점은 돈들인 티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건 테러에 가까운 평점을 난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먼저 다가오는 약점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유명 배우들의 캐스팅, 한국 영화사상 최고액의 제작비라는 이미지들로 기대를 부풀려왔던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일반적인 기대가 일종의 배신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물량으로 수식되는 영화들에 대한 기대라면, 적절한 수준의 스펙타클, 적절한 수준의 쾌감등의 스토리 외적인 '자극'을 들 수가 있겠는데 사실 이영화는 그런 쪽은 아니다. 나도 영화를 보기 이전에는 열차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어떻게 극복할 지가 주요 관전포인트 중의 하나였지만 애초에 이 영화는 그런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듯 하다. 오히려 공간의 한정성을 이야기의 흐름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이용하고 있으며, 그러니 몇 번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류의 영화들에서 기대할 수 있었던 특징들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물론 나에게는 그런 점들이 오히려 좋아 보였다. 마치 왕년의 성룡 영화에서 같은 액션 장면을 몇 번이고 똑같이 재생시켰던 것처럼, 이 장면에 돈을 많이 들인 만큼 기어이 뽕을 뽑겠다는 듯 덤비곤 했던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자세가 좀 후져보였기 때문이다.[각주:1] 대신에 캡틴 아메리카에게 수염을 덕지덕지 붙여 이리 툭, 틸다 스윈튼에게 두꺼운 안경을 끼워서 저리 툭 던져놓고 그들을 열차의 부품으로 활용하는 이 영화는 굳이 자기가 가진걸 자랑하려 오바해서 시선을 흐트리는 일이 없다. 엄청난 힘을 레일위에만 집중하는 열차처럼, 묵묵하지만 무서운 집중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뿐이다.






영화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해 본다면, 이 영화는 인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냄과 동시에 어둡기 이를데 없는 비관을 모두 담고 있다. 시작은 시스템의 가장 바닥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이 시스템에 의해 어떻게 핍박을 받게 되는가를 말하고 있지만, 그 핍박을 이겨내고 올라선 시스템의 정상에 어떤 고독과 괴로움이 있는가를 역시나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따지고 보면 엔진실의 윌포드나 꼬리칸의 사람들이나 열차안에 갇혀 지내는 신세이기는 마찬가지다. 열차가 없었다면 윌포드는 물론이고 꼬리칸의 사람들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며, 결론적으로 이들의 생존에 있어 가장 큰 변수는 열차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 이다. 심지어 '무임승차'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꼬리칸의 사람들은 이 생존기계에 어떤 긍정적인 기여도 하지 못한채 그 혜택만을 보고 있는것과 다를바가 없으며, 윌포드가 내려주는 단백질 블럭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지금 만큼의 인간성도 유지하지 못한채로 서로 물고 뜯다가 사라져 갔을것임에 분명하다. 엔진실의 '독재자' 윌포드는 이 모든 밸런스를 혼자서 맞추어가며 열차를 움직이게 했던거다. 과연 윌포드는 이 영화의 끝판 마왕인걸까? 


그럼에도 1인자의 괴로움을 감내해 내야했던 윌포드에게 무조건 적인 애정만을 보낼 수 없는건, 애초의 완벽했던 열차가 점점 그 수명을 다 해 가는것 처럼 마지막 인류에게 생존 열차를 제공했던 윌포드 역시나 점점 혁파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윌포드가 변해서 그렇다기 보다 상황이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것 같다. 혹독하기 이를데 없는 환경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를 제공 받았을 당시라면 누구라도 윌포드에가 감사하고 찬양을 보냈을 것이나, 자신들에 대한 핍박과 희생을 전제로 해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시켜 나가는 윌포드와 앞칸 사람들의 맥락을 눈치챈 뒤라면 언제까지나 그저 고마워 할 수는 없는것 아니겠는가. 엄밀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성자와도 같이 인류를 돌보려고 갖은 노력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담보해 줄 보호막으로써 인류가 필요했던 존재가 윌포드였기에 윌포드의 노력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윌포드를 신으로 떠 받들 필요는 없는거다. 인류의 생존은 윌포드의 노력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효과였고, 그렇기에 윌포드를 포함해 앞 칸의 인류들에 비해 꼬리칸의 인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윌포드 이후의 열차는 (곧,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다. 빙하기에서 도망쳐 나와 서로에게 생존을 위한 빚을 져가며 달려나갔던 시대가 윌포드의 시대였다면, 이후엔 어떤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윌포드의 방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밸런스를 맞출 것이며 인류를 절멸의 위기에서 구해낼 것인가. 윌포드라는 머리를 한칼에 쳐 내고 자신이 열차의 머리가 될까? '윌포드 와는 다를꺼야, 윌포드 와는' 이라고 자기 암시를 하면서. 그게 아니면, 불안하기 이를데 없는 희망과도 같은 정보를 가지고 이 모순되기 이를데 없는 지옥에서 벗어나게 될까?  부당한 희생이 강요 되는 시스템을, 그러나 익숙하고 미지의 세계에 비하면 안락하기 까지 한 열차에서의 삶에서 냉혹한 바깥 세상으로.  꼬리칸에서 부터 엔진실까지 거슬러 올라간 청년은 엔진실의 마스터키를 쥐고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자신의 선임자가 그랬을 것처럼. 이 영화가 무한한 애정과 지극한 비관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한 이유를 반복하자면, 바로 이 선택의 순간에 악인 윌포드의 고민에 대한 연민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 후임자 역시나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게 될 아주 농후한 확률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곰'이라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곰은 열차에서 벗어나는 순간 모두 죽게 될거라는 윌포드의 끊임없는 암시와 'x발 조x 그냥 문일 뿐'이라는 남궁 민수의 희망에 대한 공통의 증거가 되어주는 것이기에. 누구도 틀리지 않았으며 누구도 완벽하지 못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이 미숙한 인류는 또 어떤 생존 기계를 만들어 나가게 될것인가. 그 기계는 과연 윌포드의 열차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효과적일까? 아니면 심지어 더 못하게 될까.




                                                                 

                                                    <난 했으니까, 자 이제 니가 해봐>






















#1. '메이슨 총리'의 억양은 틸다 스윈튼이 스스로 준비한 요소라고 하던데, 

    신기하게 영화를 보기 전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다가 영화에서 접하자 마자 

    '어, 저 여자는 대처?'라는 느낌을 받았다.

     

#2. '유치원 칸' 장면은 어딘가 박찬욱스러운데가 있었다.

      뭐, 좋았다는 얘기다.

     

#3. '그레이', 댁은 뉘시오?   -.- b


#4. 양갱의 재발견. 

     해외에서 이 영화와 관련된 행사가 개최된다면 간식으로 양갱을 내놓는것도 좋을 듯.ㅋ




<위의 사진, 동영상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원작자에게 있습니다.>











  1. 난 아직까지도 왜 정우성이 그토록 오랫동안 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말타고 총질을 해야 했던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길어도 너무 길었단 말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어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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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한 아이의 외양을 가진 절대악의 화신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오멘'시리즈와 닮은 부분이 있다. 그러고 보니 한 때 여름만 되면 납량특집 영화로 빠지지 않았던 오멘인데 요즘은 이미 옛날 영화가 되어버려서 인지 방영되는 일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오멘과 같은 이른바 '악령'을 다루는 영화도 거의 제작되지 않는 느낌이;;; 대신에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악행에 대해서 미지의 악령에게 그 죄를 뒤집어 씌우던 단계에서 좀 더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지칭을 하기에 이르른다. 바로 '싸이코패스'가 그것. 싸이코패스는 21세기에 이르러 지난 세기의 '악령'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고 상당수의 공포영화를 비롯해 절대 악인을 다루는 영화들은 이제 철지난 악령에 매달리는 대신 싸이코패스를 등장시키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케빈이 그렇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악행의 연속. 그러나 그의 행위가 잔인한 이유는 행동의 잔악함 보다도 자신의 악함을 숨기고 전혀 딴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점 때문이다. 심지어 유아기를 갓 지난 시절 부터 아버지 앞에서는 마치 가면을 쓴 듯 착한 아이의 모습이지만 어머니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심지어 무언의 협박을 감행하는 수준까지 보여주는 케빈이다. 때문에 고작 유소년기의 아이가 저지르는 고작 말썽 정도의 행위에 불과함에도 케빈의 행동에는 섬짓함이 느껴진다.


 이 과정에서 엄마인 에바(틸다 스윈튼)는 혼란 스럽다. 남편이 둘도 없이 귀여운 아들로 여기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느껴지는 케빈의 실체가 무엇보다도 힘들지만 저 생명을 낳은 것이 자신이라는 '원죄'가 무엇보다도 그녀를 힘들게 한다. 그리고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이 영화에서는 두개의 상징적인 장면이 에바의 이 내면을 설명하고 있다.


1) 토마토를 뒤집어 쓴 에바.

 영화의 시작은 어느 지역의 토마토 축제에서 토마토를 잔뜩 뒤집어 쓴 채로 황홀경을 느끼고 있는 에바의 모습이다. 분명 축제의 모습이지만 이 영화에 대한 약간의 사전 지식만으로도 온 몸에 붉은 빛을 뒤집어 쓴 사람들의 슬로우 모션은 불안하기만 하다. 

 이는 여행 작가로 자유로운 삶을 살던 에바의 '습성'이 (계획되지 않은 임신으로 엄마가 된 후에) 육아에 필요한 행동들과 충돌이 발생하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다. 나름 최선을 다해 보지만 이성이 통하지 않는 갖난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에바. 심지어 어떻게 해도 계속 울기만 하는 아이의 울음 소리 때문에 시끄러운 공사장 소음으로 그 울음소리를 지우려 하는 그녀다. '육아를 위해 필요한 헌신을 다 쏟지 못해서 아이가 이렇게 된걸까?' '자유롭고 싶었던 나의 욕구가 이런 괴물을 만들어 낸걸까?' 토마토 씬 말고도 이 영화에서는 붉은 조명을 직관적으로 사용하는 대목이 종종 등장하는데 자유로운 축제의 장에 온통 붉은 빛이 넘실대는 토마토 씬은 바로 에바의 자유롭고 싶은 욕구와 '핏빛 비극'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에바의 심리상태가 드러난 장면이 아닐까 짐작 해 본다.


2) 물어 뜯은 손톱, 깨진 계란 껍질

 케빈의 핏빛 비극이 일어난 후, 사람들에게 에바는 케빈과 동급의 인물이 되어있었다. 마음껏 욕하고 때려도 좋을 존재. 길을 걸어가다가도 난데없이 주먹질에 발길질에 시달리고, 집에 온통 붉은 페인트를 던져놓고 도망가는건 이제 예삿일이 되어 버렸다. 그 와중에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피해자의 가족인 듯한 여성을 보고 잠시 자리를 피했던 에바. 별일없이 다시 돌아와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데 골라놓았던 계란이 모두 깨진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뒤로 이어지는 피해자 가족의 싸늘한 시선. 누구에게 따지고 항변할 것인가. 그저 얼른 들고나와 자리를 피할 밖에. 그 깨진 계란으로 한 요리를 먹으며 에바는 껍질 조각을 하나 하나 뱉어 놓는다. 

 어쩔수 없는 이유와 상황 때문에 깨진 계란 껍질을 꾸역 꾸역 뱉어낼 수 밖에 없었던 에바. 그런데 만약에 면회장에서 자기의 손톱을 물어 뜯어 가지런히 줄세웠던 케빈에게도 어쩔수 없는 이유와 상황이 있었다면 어찌 되는것인가. 그 이유와 상황을 어머니인 에바가 만든 것이었다면, 그래서 에바에게만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다면...



사실 다른 영화 평들이나 제작진의 인터뷰를 보더라도 이 영화의 핵심은 '모성'인듯 한데, 여성도 아니고 아이를 키우지도 않는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사이코패스 살인마에 대한 접근이 더 흥미로웠고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았다. 하지만 어디 모성만을 위한 장과 사이코패스 살인마에 대한 장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세상이던가. 큰 사고가 난 이후에 자신들의 시스템 바깥의 존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악령과 사이코패스와 심지어 지역이나 인종, 혈연을 구분하는 배척과 인간대 인간의 갈등 상황이 벌어지는 순간 순간은 증발된 채로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는 무조건 적인 사랑이 존재 해야'만' 하는 모성 신화는 비슷한 맥락의 '폭력'이 아닐까.

 

 그래서 이 영화가 모성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거나 하는 말은 아니다. 단지 모성에 상존하고 있는 순간순간의 위태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 위태로움 마저도 감추지 않고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세지가 아닐까 싶다. 모성을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신화적인 단계로 설정하며 숭배하는것은 너무도 쉽게 모성 개개인에 대해서, 또 아이에 대해서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일이기에. 그렇기에 우리는 'need to talk about'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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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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