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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첫 인생을 산다. 그건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도 마찬가지. 무언가 많은 지혜를 지니고 있을 것 같은 그들도 난생처음 경험하는 70세,80세 인생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은 20대,30대 인생을 겪어 봤고 그 기억이 20대, 30대 인생을 살고 있는 후배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선배'들이( 더불어 조언을 듣는 후배들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노파심'은 그들의 경험이 인생의 전부, 절대치는 아니라는 것. 그러나 이 와중에 발생하는 비극은 나이가 들어갈 수록 자신에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스스로의 방식에 지나치게 관대해지기 쉽다는 것과 나이가 어리면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빛나는 가치를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노인은 지루한 고집쟁이에 젊은이는 버릇이 없다. 물론 개인이 마주치는 사안마다 지루한 고집이 문제인지 조언을 못받아들이는 버르장머리가 문제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각자 상항에 따라 유리하게 해석 할 뿐.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유리하게' 해석한 결과로 이 영화는 지루하다. 극장에서 본 영화 예고편 때문에 그 효과가 가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돈많이 들인 특수효과 부분을 판매 포인트로 삼았던 건지, 시의성을 잡아낸 기민한 행동이었는지 당췌 예고편의 그 너울거리는 쓰나미의 행렬을 본 관객이라면 영화의 이런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을까;;; (님들아 진짜 이러는거 아닙니다. 영화 예고편에도 허위 광고 같은 죄를 물려야 이런 님들을 그냥 확....) 뭐랄까... 영감님의 유익한 훈화 말씀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훈화 말씀의 주제는... '죽음'이다.

인도네시아의 쓰나미는 그저 예쁘장한 포장지였음을 깨닫고 이윽고 이 老감독님이 말씀하시려는게 죽음이라는걸 알게된 후로는 어떤 감상을 안겨주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 그자체를 다루려는 이 팔순 노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어떤 의미일까 하는 부분이 흥미롭게 여겨 졌다.  가슴속에 무슨 할말이 그리 많이 쌓여있는지 근 몇년동안 쉬지 않고 화제작들을 생산해 내고 있는 이 팔순 할아버지의 여정에 드디어 '죽음'이 다가 온거다. 더 정확하게는 '사후 세계'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셋은 모두 사후 세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잘나가는 언론인인
'마리(세실 드 프랑스)'는 휴양지에서 쓰나미에 휩쓸려 말 그대로 죽었다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죽어있던 당시의 경험이 너무나 강렬하게 기억되어 현실의 삶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영매인 '조지(맷 데이먼)'에게는 사람의 손을 잡게 되면 그와 관련된 영혼을 보게 되는 능력이 있다. 한때는 그 일로 많은 돈을 만지기도 했지만 하나의 기능으로서만 존재가치를 가질 뿐 정상적인 인간관계는 불가능에 가깝게 되어버린 현실을 괴로워하며 단순 노무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고로 쌍둥이 형을 먼저 보내게 된 소년  '마커스(프랭키 맥라렌)'. 약물 중독자인 어머니와도 헤어지게 된 충격으로 죽은 형에 대해서 그리워하는 것 말고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채 방황하게 된다.


모두 죽음, 혹은 사후 세계로 인해 현실의 삶이 피폐해 진 경우다. 과학적인 증거로 진실을 가려내야 하는 언론인 마리는 너무나 선명하게 남은 사후 세계의 경험을 공유할 수 없기에 괴로운 입장이다. 그 기억을 떨쳐내지 못해 잠시 삐끗했던 동안 최고의 자리도, 개인적인 사랑도 위태로워진 마리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어쩌면 그 충격 내지는 경험을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사람. 한편 조지 역시나 손을 만지는 일 만으로 상대방과 관련 된 영혼을 보아야만 하는 처지라 정상적인 일상이 불가능에 가깝다. 그가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부분도 그렇거니와 그가 가진 능력을 보고 달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은 조지에게서 사람과 관계를 맺는 평범한 일상을 가질 기회를 앗아가 버린다. 그리고 한 소년, 늘 함께였던 쌍둥이 형을 비극적인 사고로 잃게 된 후로 마치 자신의 삶의 절반이 사라져버린 듯한 공황상태에 빠진 마커스.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마커스는 영혼과 만나게 해준다는 온갖 사이비들을 통해 형의 목소리를 접하고 싶었지만 모두 사기꾼에 불과했다.

이렇게 각자 죽음을 겪어내는데 괴로워 하던 세 사람은 그러나 어느 순간 기막힌 우연으로 마주치게 되고 서로의 인생은 그 이후로 변화의 단서를 내 비치게 된다. 마리는 비로소 이해를 동반한 위안을 받게 되었고, 조지는 '괴물'과도 같은 자신에게 일상적인 인간관계를 선사할 사람을 만났고, 마커스는 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다짐을 가지게 되었다. 애초에 멀리 떨어져 살던 각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각자의 결핍이 어느 순간 톱니 바퀴의 이가 되어 각자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게 만든것이다. (어느 지점에서는 샤말란 감독의 '싸인'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그러던지 말던지)

 영화의 등장 인물들이 비로소 평안함을 찾게 되는건 스스로 그렇게나 원했던 바대로 '죽음이 주는 부담'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애써 잊어버리거나, 회피하거나, 겉으로 꾸민것이 아니라 그 부담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세 인물의 내면이 덕지 덕지 포장지로 쌓여있는 상태였다면 서로의 톱니가 아귀가 맞는지 확인해 볼 방법은 없었던거다. 물론 기막힌 우연이 이들의 결핍을 결합하게 했지만, 그 행운을 거머 쥘 때까지의 여정을 살펴 본다면 순전히 운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쯤되면 영감님이 생각하고 있는 죽음은 대충 이런거라고 봐도되지 않을까? 이해하거나, 정복하거나, 극복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는 것. 그런면에서 보자면 비록 지루한 훈화 말씀 이셨지만 팔순 노인과 내가 비슷한 부분에서 공유하고 있는 생각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반갑기도 하다. 
 






#1. 슬프게도 이젠 쓰나미가 어떻게 표현 되어야 현실적인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쓰나미 장면은 상당히 현실적이었다. 









<위의 사진들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드림웍스SKG
'에 있습니다.>









 
Posted by 어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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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soulco.tistory.com BlogIcon 지성의 전당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07.31 21:43 신고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합니다. www.uec2018.com
    인문학 도서인데, 한번 검토 부탁드립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