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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을 작은 수조 안에 갖혀 혼자 살아온 카멜레온이 있다. 이 카멜레온의 일상이란 수조 안의 장식들을 가지고 연기놀이를 하는 것이 전부. 이 수조 안에서 그는 누구도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무 모형도, 물고기 모양 장난감도, 죽어서 물에 둥둥떠다니는 파리도 원하는 존재로 재구성 할 수 있었다. 혹 그래서 이름 자체가 필요 없었을 수도. 스스로를 어떻게 부르던, 사물을 어떻게 대하던 맞딱뜨리는 저항이 없었으니까. 물론 이 카멜레온이 이영화의 주인공인 '랭고' 지만 그 랭고라는 이름은 얼떨결에 즉흥적으로 지은 이름일 뿐, 그 스스로 즉흥적으로 지어내기 전까지는 이름조차도 없는 생물이었다. 그러던 중 차에 실려 있던 수조가 사고로 인해 튕겨져 나오면서 '랭고' 또한 진짜 세상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착하게 된 사막 한가운데의 마을에서 대뜸 보안관 자리까지 얻게 된 랭고. 갈고 닦은 연기 기술과 약간의 운이 곁들여진 결과였지만 이내 마을의 숙원인 물부족 해결에 나서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행의 끝에서 얄팍한 자신의 속임수가 밑천을 드러낸 후 그는 좌절한다. 진짜 세상에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각적 자극에 비교적 둔감한 나로서는 의인화된 동물들의 움직임이나 질감 묘사에서 어떤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의인화된 동물들인 마을의 주민들이 생각보다 지나치게 지저분 하고 비교적 혐오스러울 정도의 상태로 그려졌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화는 전체 관람가 등급이 무색하게 거칠었다. 반면 그런 배경은 멀끔한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마을에 도착한 랭고를 더욱더 이방인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보여줬는데, 이런 대비에서는 어떤 의도가 읽히는 듯도 했다 . 정제되고, 규격이 갖춰진, 예측가능하고, 그래서 비교적 깔끔하지만 어딘가 생동감은 떨어져 보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가상 현실이나 마찬가지인 일종의 '문명'. 그리고 그 문명을 한꺼풀 벗어난, 보다 거칠고, 중구난방이며, 예측 불가능한, 그래서 '더럽지만(마을의 이름이 dirt)' 원초적인 생명력이 느껴지는 '문명 바깥의 세계'. 그 경계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서 개인으로서의 한 존재는 어마어마한 우주에서 먼지와도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말 할 수도,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체계로 쌓아 올려진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랭고는 익숙한 세상의 바깥으로 한발자국을 내 디딘 것이다. 

 랭고의 한 발자국이 더 넒은 우주로 향한 내디딤인지, 더 안으로 파고드는 체계에 대한 탐구인지는 쉽게 구분하지 못하겠다. 비로소 수조 바깥의 넓은 세상에 나와서야 이름을 얻게 되었고, '마을'에서 멀리 벗어나고 나서야 마을의 물부족 사태를 이해 할 수 있었던 측면에서는 랭고를 '가가린'쯤으로 여겨도 좋겠지만, 결국 그 성취는 바깥으로 향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함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쪽으로 향하더라도 비슷한 지점에 다다를 수 있는...






영화에서는 마을의 주민들은 물론 랭고 그 자신도 마치 산사의 선문답 처럼 주인공인 랭고에게 '넌 누구니?'라는 질문을 자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커다란 우주 속의 한 먼지 정도나 될까 말까한 존재인 나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체계들로 구성 된 나는, 누구일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자신의 세계에서 껍질을 깨 나갈 수록 랭고는 진실에 가까워 진다. 그래서 자의였던 타의였던 진실에는 무관심 했었던 수조안의 자신이, 진실에 한발자국씩 내디딜 수록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무엇도 모두 될 수 있다고 믿었었던 바로 그 자신이 말이다. 어떤 신념,규율 따위의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일정한 구분을 넘어서면 그렇게 대단할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슴아픈 진실.

누군가는 인터넷 게임 속에서 영웅이 된 스스로에게 빠져 집착하는 사람을 보고 진짜를 깨닫지 못하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혀를 찰테고, 누군가는 뻔한 착취관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전전 긍긍하며 사는 존재들의 아둔함에 안타까워 할테고, 어떤이는 무지로 인한 것인지 고의로 모르는 체 하는 것인지 자기가 써 재끼는 자원들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는 채로 환경이 점차로 사람들에게 강퍅해지는 것에 대해 남의 허물만을 찾아 탓하는 이들이 가증 스러울 것이다. 나도 어느 인터넷 게시판 언저리에서 이 영화를 보고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글을 접한터라 그 뻔뻔함을 지적하고 픈 참이지만, 지금의 나 역시나 전기를 펑펑 써가며 가증을 떨고 있는 입장이라 좀 머쓱하기도 한...뭐 그런 입장이다.

사람들은 입버릇 처럼 진리니 진실이니를 찬양하고 떠들어 대지만, 사실은 그 진실이 얼마나 냉혹하고 무자비 한 것인지 안다. 이 보잘것 없는 나도 대강 눈치챈 그것을 지금껏 몰랐을리 없다. 그래서 그 무서운 진실을 되도록 멀리 떨어뜨려 놓고는 그 언저리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무수한 장애물을 만들어 놓는거다. 그렇게 되면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내가 포기하고 살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에 이르기 까지의 '무수히 많은 장애물을 이겨낼 힘이 없기 때문'으로 그럴 듯 하게 포장이 된다. 대신에 '진실에 다가서겠노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품평을 하며,지지를 하며, 무시를 하며 그렇게 대충 진실을 향하는 것 같은 자세로 질겅질겅 씹어대다 뱉어낼 뿐이다. 

   이 영화는 이런 진실의 맛을 '대충' 효과적으로 구현해 냈다.








#1. 걸작인지는 감히 평가하지 못하겠지만, 저주는 받을거 같은 작품. (물론 내 짐작일 뿐이지만 )애들의 정서에도 그닥 맞지 않고, 내가 글에서 말한 의미들에 큰 비중을 두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른들이 보기에도 이야기 진행이 비교적 평이하다. 아님 말고.

#2.  깨알같은 패러디들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특별 출연'은 그나마 웃음 포인트.

#3. 오히려 서부극의 분위기를 능청스럽게 구현해 내는 부엉이 악단이 압권. (참고로 영화 음악은 '한스 짐머'가 담당)

 






<위의 사진들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CJ E&M 영화사업부문'
 에 있습니다.>









Posted by 어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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