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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아이들이 자라오면서 가지는 공통된 경험이 있을 테다. 이를테면 뭘 안다는 걸 드러냈을 때 칭찬을 받는. 아비 어미의 얼굴을 알아보고, 아비 어미의 이름을 알아보고, 간판의 글씨를 알아보고, 알파벳을 알아보는 등의... 물론 자신의 아이가 그 조그만 입으로 뭔가 말을 뱉어 낸다는 건 신기하고도 감사한 일이겠지만, 그래서 그 기쁨에 국적이며 인종의 구분이 없는 일이겠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다른 아이보다 빨리 알파벳을 알아보고 구구단을 외우는데 관심이 많다(고 나는 느낀다). 이쯤 되면 신기함과 감사함을 넘어서 이미 어떤 우월성을 다른 이의 아이와 다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이 말이다.


그럼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학교라는 데를 들어가면 어떻게 되느냐, 정해진 정답이 아니라면 바로 삭제를 시키는 연습에 부단히도 매달린다. 어느 과목을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많이 배우신 양반들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만들어 놓은 ‘텍스트’는 어떤 이의제기과정도 없이 진리로 입력된다. 공부해야 하는데 농구는 무슨 놈의 농구, 교과서에 나온 주제는 ‘이것’ 인데 니 생각은 무슨 놈의 니 생각. 한 인간의 십 여년의 시간동안 일체의 대학에 가기 위한 노력 말고 다른 감정과 욕구는 항상 후순위이고, 무시해야 할 것들. 시를 보고 느껴야 할 것도 정답이 아니면 그저 무시해도 좋을 쓰레기 같은 감상.


아는 게 힘인 세상에서 똑같은 걸 보고도 무언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진실에 가까운 그 무엇’을 발견해 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힘이다. 그래서 그 힘을 가지기 위해 주위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일상에서 진실에 가까운 그 무엇을 발견해 내었음을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동조하도록 그 증거를 드러내 보이게 된다면 명실상부하게 그 ‘힘’ 이란 걸 얻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김병욱 피디는 실패. 증거 불충분. 시도는 좋았어. 그래도.



 





두 편의 인터뷰 기사를 다 읽어 보았다. 구구 절절한 그의 설명을. 그의 의미 부여를 전적으로 인정한다(고 치자). 그래도 당신은 틀렸다.



1. 이 코드가 니꺼임?

얼마 전에 김태원이 방송에 나와서 오랜만에 뮤지션의 카리스마를 은은하게 내뿜으면서 남기신 한마디다. 가장 쉽게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만 말해 보자. 아주 현실적으로 식모와 의사 도련님의 사랑의 진행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서로의 감정이 솔직하게 모두 드러나 파바박 불꽃이 튄 순간 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은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멈추어 버린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식모 세경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반면, 더 이상 고통의 순간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주는 동시에 일체의 어떠한 행복마저 접할 수 없는 단절 끝으로서의 죽음. 이처럼 김병욱 피디가 사용한 ‘죽음’이라는 코드는 충분히 다른 의도로도 읽힐 수 있는 코드다. 자신이 그렇게 사용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죽음’이라는 코드를 다른 의미로 읽어 낸 것이 잘못되었다 말한다면 안 된다는 뜻. 그렇다면 ‘죽음’을 그저 단순하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다른 의미의 행복일 수도 있다는 여지를 인정해 줘야 하지 않느냐고? 왜 죽이느냐고 뭐라 뭐라 하느냐고?



2. 아프잖아.

또 다른 행복이라고 읽어 낸다면 일종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끝이라고 읽어 버리면 그 자체로 일종의 폭력을 당한 셈이니까. 불쌍한 세경에게 감정 이입을 했던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으로 자신의 행복이 영영 사라져 버린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니까. 한 부류의 즐거움을 위해 한 부류는 고통을 느껴야 한다면 너무 불공평하잖아. 그럼 왜 행복으로 읽어내지 못하느냐고? 당신들이 그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줘도???

그렇다면 내가 거꾸로 물어 보고 싶은 것은, 왜 ‘색, 계’는 공중파에서 방송이 안 되는 거지? 설마 포르노라서? 왠지 그런 거 같아도 대놓고 포르노 같다고 그러면 뭔가 부족해보일거 같아서 그렇다는 대답을 할 사람은 많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예술적인 함의가 있어도 벗은 몸은 벗은 몸이고, 신음은 신음이니까. 가정은 극장 보다는 나이 통제를 통해 과도한 성애 장면으로부터 19세 이하의 사람들을 보호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된 영화의 정수를 느끼려면 극장에 가거나 dvd를 빌리거나, 정식이던 불법이던 파일을 다운 받아야 한다. 왜 공중파에서 그런 예술적인 함의를 이해 못하고 훌륭한 영화를 방영 안하느냐는 ‘징징거림’은 힘을 받기가 어렵다. 그 함의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컨텐츠 자체가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got it?  (아니면, 초딩들도 얼마든지 야동을 다운 받아 즐길 수 있는 시대를 못 따라 가고 꼰X짓 하고 있다고 해 보시던가. 이말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왜이렇게 많은지;;)

그러나 피디의 입에서도 80%의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는 말이 나오는데도 왜 다수가 저런 반응을 보이나 에 대한 접근을 할 필요는 못 느끼고 있는 것 같다.



3. 정답입니다? 틀렸습니다.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맞는 것을 쥐고 있으며, 나와 다른 것을 쥐고 있는 사람은 보다 표면적이고,단순하고, 그래서 핵심과 먼, 틀린 것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고통의 해소도 무지 몽매한 80%가 나머지 20%처럼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쥐었을 때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걸 뭐라 한다던가? 선민의식? 지적 허영?  물론 예술분야를 뛰어 넘어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선도적인 성취는 아주 적은 소수의 몸부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가, 혹은 지식인들의 시도에서 지적 허영과 선도적인 도전정신을 무리 없이 분리해 내기란 쉽지 않다. 어느 정도는 같은 개념이라 봐도 좋고. 혹은 시작은 지적 허영이라도 담금질을 버텨 오면서 후에 진취적인 성과로 나타나기도, 시작은 선도적인 도전이었더라도 담금질의 과정에서 튕겨져 나간다면 그 결과물은 결국 지적 허영으로 치부되고 마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면에서 보자면 김병욱 피디는 성취라는 면에서도 실패 했다.



4. 쫄리면 돌아가시던가요...

내가 자주 가는 블로그가 있다. 현직 프리랜서 기자와 방송국 피디 등으로 구성된 팀 블로그 형식의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이 올라오는 블로그다. 그 컨텐츠 중의 하나가 이러 저러한  정보를 2인이 대화로 주고받는 형식의 1부, 한 주제를 놓고 본격적인 대담이 이루어지는 2부로서 이름 하여 ‘쾌변’이라는 녹음 방송이 1주일 마다 이루어 졌다. 그 방송에서는 참 여러 가지로 많은 주제를 다루었다. 방송의 분위기가 어떠한 것이었나를 알아보기 위해 몇몇 제목들만 거론해 보면, ‘똑똑한 김태희의 천치적 연기 생활’ ‘복근으로 연기하는 배우들’ ‘이승환, 추락하는 피터팬’등등. 뭔가 급 땡기는 주제 아닌가? 어디서도 대놓고 꺼내놓지 못했던 hot한 이슈들을 진짜 hot하게 이끌어 냈던  이 방송은 주제가 hot할 수록 그 반응도 hot했다. 방송파일은 이제 짤리고 안나오는 모양이지만 그 전투의 흔적들은 댓글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특히 어떤 가수를 다루었던 경우에는 그 파장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방송의 구성원이었던 프리랜서 기자가 게스트로 출연하던 공중파 라디오 방송의 게시판에 몰려가 당장에 자르라고 도배가 되는 것은 물론 입에 담기 힘든 욕설 댓글로 그 기자가 법적 대응의사를 밝히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그러나 그 뒤로 그 팬덤과 어느 정도 의견이 오고간 후로 파국으로 까지는 다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이 방송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그럼 지적 허영을 마음껏 뽐내기 위해 많은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걸까? 아니면 많은 압박 속에서도 비평 문화가 고사되다 시피 한 한국 대중 문화계의 한 줌 거름이 되고자 노력했던 걸까? 평가는 쉽지 않다. 그들에게 동조했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도였겠지만, 그들의 발언으로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에게는 그저 ‘까서 뜨려고 환장한’ 사람들이었을 수도. 그러나 두 부류의 사람들도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그들은 그 저항을 온몸으로 다 받아 냈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댓 글 내용 중 타당하다 여긴 지적을 받아들이며 다음 방송에서 사과하거나, 직접 댓 글로 소통하며 ‘키보드 배틀’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수익성에대한 문제 등등으로 ‘쾌변’이라는 방송은 문을 닫았지만 그럼에도 대한민국 안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의사 표현이 어느 수위, 방법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지에 대한 ‘경험’은 당사자들에게 어느정도는 이루어 졌다고 본다. 그건 전적으로 방송에 동조하는 입장이나, 방송을 통해 상처를 받아 심한 욕설 등등으로 파국의 직전까지 다다랐던 일부에게나 마찬가지였을 테다. 다시 말하지만, 반성하거나 사과하거나, 논박하거나, 심지어 법적인 분쟁까지도 생각 할 정도로 '피해가는 일‘없이 온몸으로 반응을 했기 때문에.  
 
 반면, 김병욱 피디는 자신의 작품을 접한 80%에게 이런 정도의 아픔을 주고도 어떤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과 없는 고통만을 쥐어준 셈이다. 그가 이후의 다른 시트콤 장르에서도 ‘지붕킥’ 같은 질감의 이야기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선구자이려면 이해 못한 80%가 그를 통해 소통 할 수 있게 배려했어야 맞다. 이해 못할 정서로 인해 관심 층에서 떨어져 나가는 반응, 그 떨어져 나간 시청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힘, 시청자들의 의도와 반대로 흘러가는 이야기로 인한 격렬한 반응, 그 사람들을 이해시킬 만한 개연성, 등이 김병욱 피디는 물론 시트콤을 지켜봤던 시청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이 이후의 다른 작품에서 시트콤을 대하는 좀더 색다른 기반이 되는 것이나, 80%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다른 말을 하다가, 최종회에 가서 자기 할 말만 하고 끝내버리면 결국 이후의 다른 작품이 맞딱 뜨려야 할 시트콤에 대한 기반은 도로 ‘0’베이스가 된다. 더 이상 ‘지붕킥’의 피디 혹은 작품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대상조차도 없는 하소연만이 지속되고 남는 것은 자기 할 말을 했다는 피디의 만족감과, 20%의 동조 뿐. 심지어 대상없는 하소연을 지속하는 사람들마저도 모두 포함된 시청률 20%이상의 성적표는 그 하소연을 하는 사람들마저도 자신의 지지자로 둔갑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김병욱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피디가 된다.




 5. 손석희도 반박할 시간은 줬다. (조금이라 그랬지....)

김병욱 피디는 100분 토론에 토론자로 방송에 출연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토론자로 나온 입장이었다면, 상대방의 말을 못 알아먹는 토론자는 곧 지고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그만한 ‘수련’을 쌓지 못한  그 쪽이 잘못인 것. 하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하는 텔레비전 극작가로서 자신의 입으로 80%가 납득을 못한 것 같다는 말을 한다는 건 스스로 자신의 ‘수련’이 모자랐음을 실토하는 꼴이다. 그런 지경에서 (꾸질꾸질한 주인공의) 죽음을 마음대로 휘둘러서는 안 되는 거고.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편견?
잘못 다루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건강하지는 못하겠지. 나한테 아직도 가장 최고의 드라마는 주인공이 소매치기로 전전하다 뇌종양 걸려서 충격으로 아버지는 자살하고 결말에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안알려 주는 '열린 결말'로 끝났던 '네멋대로 해라'다 이 09 09 들아. 






->참고한 글
http://10.asiae.co.kr/Articles/new_view.htm?sec=people5&a_id=2010032315302213396
 김병욱 감독, 지붕킥 결말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1,

http://10.asiae.co.kr/Articles/new_view.htm?sec=people5&a_id=2010032315305717978
순풍 부터 시작한 가족 이야기는 이제 끝났다 2.
Posted by 어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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