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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당신은 입고 나갈 옷의 상표를 노출시키지 않게 위해 덕지 덕지 테잎으로 가리는가?

(흡연자일 경우에) 담배를 피우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이 전혀 닿지 않는 외진 곳을 찾는가?

가까운 친구 사이에 쓰는 가벼운(?) 욕설을 의.도.적.으로 순화시켜 표현하는가?

혹시...카메라를 든 수십명의 사람들이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 다니는가?

아니라고? 음..그럼 당신은 '리얼'세상에 살고 있다.



 옛날에 살았던 어떤 의심 많은 프랑스인은 '내가 지금 X나 머리 굴려가면서 의심하고 있는 것'에 도달하기의 전까지 이르는 '모든 것'을 의심 해 볼 수 있다고 했단다.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걸핏하면 들이미는 ‘방송의 리얼리티’에 대해서 이 정도 의심은 한번쯤 가져 볼 만하지 않을까?

사례1. 자연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화면이 얼룩말을 쫒아가는 치타를 잡고 있다. 당연히 멀리서 전체적인 전경을 찍은 화면이지만 신기하게 풀숲을 뛰어가는 소리가 바스락거리며 난다. 후에 덧입힌 소리다.


사례2. 드라마에서 전형적인 한국 가족의 단란한 식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밥상에 빙 둘러 앉아 먹는 것이 아니라 세 면에만 사람이 앉고 한 면은 그대로 비워둔다. 그 면에 텔레비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사례3. 버라이어티쇼에서 생선을 다듬는다. 팔딱거리는 생선을 기절시키기 위해 칼등으로 생선의 머리를 내리 친다. 눈알이 튀어 나왔다.


그래, 풀숲을 치타가 뛰어 간다면 ‘바스락’ 소리가 나긴 할 거다. 그런데 뛰어가는 소리를 직접 잡아낸 대신에 비슷한 소리를 덧입힌 거라면, 방송의 리얼리티에 반하는 행동일까? 풀숲을 뛰어가면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치타가 풀숲 위를 뛰어간다. 고로 소리가 나야한다(?) 치타의 바스락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덧입히는 것이 리얼리티 추구에 부합하는 행위이려면, 실제로 치타의 발에 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잡아내지 못한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존재’가 사라져야만 한다. 사력을 다해 도망가는 얼룩말을 쫒아가는 치타(의 발소리)를 놓친 제작진의 한계...가 발소리 없는 풀숲 추격전을 만든 것이기 때문에. 자... 강호동씨가 ‘예능’의 반대말로 쓰는 듯 하는 ‘다큐’에서도 리얼리티를 따진다는 건 이처럼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관찰 대상이 정해지는 과정은, 편집 과정에서 여러 화면들을 선택하고 버리는 과정은, 또 얼마나 리얼리티를 살리는데 부합하는 행위일까? 다른 편집자가 다룬다고 해도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내가 갔어도 얘를 찍었을까?

하물며 예능 프로그램이라니... 생계가 달린 사안에 얼마만큼의 자연스러움을 보여야 하나.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은 시청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더구나 요즘 같은 시대에는 다른 식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쉽지 않아서 특별하게 웃음을 주는 일에 뜻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러 저러한 ‘쇼’에 얼굴을 디밀어야 한다. 그런데 그 쇼에 나가서 선택받지 못한다면? 고정 출연자가 되어 따박 따박 나오는 고정적인 수입을 얻을 기회를 포기해야 함은 물론, 가수나 연기자로서의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데에 있어서는 훨씬 제한되어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리얼’이란 무엇 인고 하니, 전쟁 영화 앞에 붙는 ‘스펙타클’, 스릴러 영화의 앞에 붙는‘ 서스펜스’, 에로틱한 영화 앞에 붙는 ‘문제적 사랑’과 비슷한, 그저 수식어일 뿐이다. 스펙타클이 없어도 전쟁영화가 되고, 서스펜스가 없어도 스릴러 영화가 되고, 그 사랑이 문제적 사랑이 아니라도 에로틱한 영화가 나오는 것처럼 ‘리얼’없이도 리얼 버라이어티는 가능하다. 위에서 예를 든 두 번째 사례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 위해 적당히(그냥 넘어가기로) 합의 된, 그 불문율을 넘어선 어떤 설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른바‘리얼 버라이어티’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밥상에 앉는 모습이야 공히 카메라가 그 들의 정면 얼굴을 잡도록 한 면을 휑하게 비워두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토크쇼에서 보이는 정제된 대사와도 같은 어투가 일상어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다던가, 방송국 세트장이 실제의 집이나 마을로 대체된다던가 하는 식으로 ‘보다’ 현실적으로 보이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현실적’에서 현실은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나라’를 벗어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생선 기절시키려고 칼등으로 머리를 내려치는데 눈알이 튀어나오는 세상은 심의에서 경고를 먹는단 말이다.  방송국 복도를 지나가더라도 방송국 노조가 내건 대자보며 현수막이 비추어 지면 ‘좌빨 방송’이 되는 거고.


이 프로그램속의 ‘리얼’이 정제가 되어야 하는 건 상부기관의 검열이나 사회의 통념 같은 터부들 때문만은 아니다.프로그램이 전개되는 약 2일정도의 시간으로 보거나, 프로그램이 실제로 방영되는 1시간여의 시간으로 고려하더라도 ‘리얼 버라이어티’속의 세상은 신나고, 재밌고, 즐겁다. 여간 재밌는게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재미있어야 하기 때문에 재미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증발된다. 일례로 ‘유선관’을 다룬 프로그램과 관련한 포스팅이 있었다. 이 글에 따르자면 방송에서 보였던 왁자지껄, 들썩들썩한 분위기는 유선관과는 맞지 않은 분위기였고, 그로 인해 기존에 유선관을 운영해 오던 측에서는 적지 않게 곤혹함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화장실도 공동 사용이고, 그 흔한 텔레비전 한대도 (당시에는 고장이 나서 )없는 곳에서 ‘그 들’은 너무나도 재미있게 놀았다. 말 그대로 절간 근처에 있는 오지의 기와집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재미있게 놀았던 거다. 그렇게 그 재미에 공감한 많은 시청자들이 ‘유선관’을 찾을 테지만 방송과 같은 재미를 느끼지는 못할 거다. 방송에서는 생략 되었던 공동 화장실이나, 인터넷은커녕 텔레비전도 공동으로 봐야 하는 환경이 그 재미를 반감 시킬 테니까. 말하자면, ‘그 들’의 흥겨움이 의도적으로 너무나 과했다는 거다. 왜? 웃겨야 하니까. 큰 웃음을 빵빵 터트려야 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의도적으로 과장된 웃음을 통해 전달해 주는 ‘리얼’이 진짜 현실보다 더 현실로 느껴진다는 거다. 이를테면 조미료에 찌든 음식에 익숙해지면 순수한 자연의 음식이 심심하고 맛없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래서 남의 고민, 연애담을 공유하기 위해 들여야 할 노력 대신에 점점 더 손쉽게 리모컨을 들고, 강심장과 우결을 튼다. 한눈에 봐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선남, 선녀들이 나와서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아주고, 알콩달콩 연애질을 한다.  오랜 기간 동안 허물없이 관계를 이어온 친구 사이에서나 가능 할 법한 일들이 리모컨을 돌림으로서 화면을 통해 가능해 진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허물없는 관계를 만들기 위한 조건이 점차 리모컨을 돌리며 접했던 그들에게로 맞추어 진다. 허벅지는 탄력있게, 허리는 잘록하게, 피부는 뽀얗게, 귀여운 얼굴에 식스팩, ‘간지’있는 패션 센스에 ‘기본’은 되어야 할 재력, 등이 말 그대로 기본이 되어가고, 그 기본을 위해 닭 가슴살을 씹고, 헬스장을 끊고, 밥을 굶고, 카드를 긁는다. 당의정이 아니면 약을 못 삼키는 아이처럼, 어딘가 재밌게 포장을 해주지 않으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도 이렇게 저렇게 포장해 보려 안달들이 나고 온 국민이 엔터테이너화 되어 간다. 점점 더 현실을 접할 수 있는 창구는 줄어들고, 단 껍데기를 덧입혀야 팔린다. 가수가 그랬고, 연기자가 그랬듯이, 복싱선수의 투혼도 당의정의 축복을 통해서만 이슈가 될 수 있다. 

 
 이 단계가 어느 정도에 까지 이르렀는고 하니, ‘진짜 현실’이 ‘가짜 현실’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되어 외려 그 진짜 현실을 나무라는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 당장에 기억나는 사안은 어느 출연자가 요리선생님으로 초빙된 요리사의 조언을 무시하고 감정의 날을 세운 후 있었던 후 폭풍이다. 무려 ‘공익’을 위해 먼 뉴욕 땅까지 갔는데 거기서 유치하게 감정싸움이나 하고 왔다는 거다.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나라여야 할 텔레비전 속의 뉴욕에서 오로지 정준하만이 자신의 있는 감정 ‘그대로’를 노출 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정말로 ‘현실적인’ 그 의견 충돌이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나라에는 어울리지 않았기에 몰매를 맞았다.


 


지금도 조금만 검색 해 본다면, 이른바 ‘리얼논란'이 수 도 없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진짜도 아닌 걸 두고 진짜를 따지고 있다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건 방송 권력에 정교함을 요구하면 할수록 그 것을 통하지 않고 현실을 접할 여지는 줄어든다는것. 당신이 TV를 통해 본 '리얼'이 리얼하지 않다면 그 책임은 방송 제작진에 있는 것이아니라, 고작 TV앞에 앉아서 '진짜'를 기대한 당신에게 있다.




Posted by 어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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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jsapark.tistory.com BlogIcon 탐진강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0.02.28 18:25 신고

    바보상자가 인간의 뇌를 지배해 버렸군요.
    요즘 3S 정책은 자연스럽게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라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