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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는 유치원 교사다. 그는 고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부분 오랜 친구들의 아이들이기도 하다. 영화는 초반에 마치 철 안든 소년의 장난끼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듯한 이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한가를 자연스럽게 묘사하는데, 이들 사이의 균열이 일어났을 때의 파장을 더 크게 느껴지도록 하는 장치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균열이라는 것은 너무나 우습고도 무섭게 다가오게 된다. 이리저리 널을 뛰곤 하는 한 아이의 생각속에 어느 한 순간 루카스가 남자로 보였고, 짐짓 냉정한 태도의 루카스에게 상처를 받은 아이의 비뚤어짐이 이 사단을 일으키게 된거다. 단지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접한 우연을 루카스에게 투영한 이 아이의 발언은 루카스를 소아성애자로 만들고 만다. 이 후로는 아이들을 위한 루카스의 선의에 의한 행동 조차 악행의 근거로 소환되는 지경.


사실 난 루카스가 오해를 받게 되는 지점에 쉽게 동화 될 수 없었다. 아이의 발언은 어떠한 정황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할 만큼 흐릿했고, 그럼에도 정식으로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사람들은 루카스를 단정지어 버렸다. 자신의 아이가 성 학대를 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사리 분별에 방해가 되었을까? 루카스는 왜 그런 유치원 원장이며 주변 사람들의 행패에 그저 당하고만 있을까? 이 중에서 루카스가 왜 이런 부당함을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까 하는 의문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법적인 판단을 받고 난 이후에도 사람들의 의식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부당하게 자신을 모욕하고 해고를 한 원장을 고소한다고 해서, 승소 한다고 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질리가 없었던 것. 루카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고향과 주변 친구들은 그에게 무차별적인 증오를 표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고향과 주변 친구들로 인해 확인할 수 있었던 루카스의 자아는 그만큼이나 무너져 내려 버린것이고, 그건 소송으로 회복 할 수 있는것이 아니었던 거다.


영화의 초반 장치들에 쉽게 동화되지 못한 결과를 영화 외적으로 짐작해 본다면 아마 나 역시도 전혀 이성적이지 못한 이성적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이성理性'에 대해서 뭔가 특허라도 낸듯한 이미지의 유럽, 그 중에서도 복지국가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북유럽 아니던가. '그렇게 훌륭한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저렇게 비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가 아마 내가 가진 잠재의식이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그들의 비이성이 표출되는 부분인 '아이들에 대한 신뢰' 역시 내가 살아온 문화권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기에 낯설었을 수도. 루카스에게 부당함을 안기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아이는 거짓말 하지 않아' 인데, 이건 마치 '노인의 지혜'에 절대적인 권위를 안겨주고 있는 (혹은, 안겨주었던) 한국의 문화와 그 모양은 같지만 그 대상은 정 반대의 것이었다. 아이의 발언에 대한 신뢰를 인정해 주는 과정에서 어른의 반론에 대한 무차별 적일 정도의 공격은 내가 이제껏 접하지 못한 것이었으니.[각주:1] 이런 갈등 상황도 한국에서는 대부분 어른들의 권위가 아이들의 정당한 요구나 발언을 묵살하는 모습으로 표출되는 것이 익숙한 일이지 않은가. 영화에서도 대부분 어른의 권력에 의해 아이의 진실이 억압받는 식으로 다루어지곤 하고. 이 두 문화권의 차이도 흥미롭게 본다면 참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다시 영화의 내용으로 돌아와 본다면, 이렇게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인식한다고 해도 그 대안이 없기에 이런 문제제기가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기엔 너무나도 두렵고 그래서 그 불합리함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는 부분을 자꾸 지적하니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거다. 이 대목에서 진짜로 아득한 갑갑함이 몰려오는 것은 이 싸움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점 때문이다. 다수의 안정을 위해 불합리하게 그저 '합의'하고 있는 사안에 걸려든 개인의 고통,안정을 위한 불합리가 합리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괴로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환기가 이 영화가 말하려는 핵심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위의 사진, 동영상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원작자에게 있습니다.>







                                                             다음 뷰 베스트에 올랐슴다.



  1. 생각해 보면 아이의 사랑고백에 루카스만큼 정색하고 반응 한다는 것도 일맥상통의 상황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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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옛날 드라마'에서 임신을 다루던 방법은 이랬다.


가족이 모여 밥을 먹거나, 시어머니와 같이 음식을 준비하는 며느리

-> 그러다 며느리가 헛구역질을 '욱'

->며느리를 쳐다보는 가족 내지는 시어머니

->다시한번 며느리가 헛구역질을 '욱'

->뒤따르는 시어머니의 대사. "아가~"

->그제서야 뭔가 깨달은 듯한 며느리의 표정.


뭐 이정도.





  어떤 지점을 지나게 되면 한국 드라마에서는 더이상 헛구역질로 임신을 알아채지 않는다. 달력을 보고 날짜를 헤아리기 시작한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그 동안의 드라마에서는 다루기를 거부해 왔던거고, 거창하게 본다면 딱 그만큼 세상이 변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 사춘기를 지난 '건강한' 여성이 생리를 한다는 정보가 부끄럽고 숨겨야만 되는 일이라고 취급받던 세상에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 주는 '항변'이자 세상이 이미 그렇지 않다는 '증거'라는 의미에서 난 드라마의 '임신 확인' 대목의 변화를 곱씹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동안에 여타의 극들이 제대로 다루지 못한 부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고문'이다. 


그동안 고문을 다루던 방법은 또 이랬다.


나쁜 사람들에게 묶여 고문을 받는 주인공

->신체적 고통을 가하며 '실토'를 요구하는 나쁜 사람들

-> 두 눈을 부라리며 기세를 꺾지 않는 주인공

->정신을 잃으면 찬물을 끼얹어 깨우기를 여러번

->극적인 도움을 통해 '배신자'가 될 위험에서 구조되는 주인공


대략 이정도.


 물론 '직접 당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러쿵 저러쿵 한다는게 멋쩍은 일이기는 하다. 다만 일반론적인 수준에서 그 정합성을 생각해 본다고 해도 사실 그동안 고문을 다룬 정형화된 접근은 뭔가를 놓치고 있는 느낌이다. 단지 주인공이 위대함을 갖기위한 과정에서 하나의 소품처럼 쓰였다고 하면 맞는 표현일 것 이다. 적에도 나의 경험에선 고문이라는 소재를 이처럼 '성의있게' 다루었던 영화가 없었다.   


단지 고문의 과정이 사실적으로 느껴지고 말고의 문제를 넘어서 고문 피해자가 고통을 겪는 지점을 이 영화 '남영동 1985'는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마치 장인의 손길과도 같은 '장의사' 이두한(이경영)의 손길은 버텨낼 수 있을 성질의 것이 아니며 한없이 냉정한 그는 여간해서는 위압적으로 겁을 주는 일도 없다. 그런 그에게 갖은 고통을 받는 주인공 김종태(박원상)가 가장 큰 상처를 안게 되는 지점은 결국 굴복당했다는 자괴감이다. 심지어 겉으로 드러나게 상처를 내지도 않으며, 정신을 잃으면 수액까지 맞춰가며 김종태를 '극진히' 보살피니 그 악독한 고문 행위들이 눈앞에 보여도 그의 육체적인 고통은 오히려 눈에 띄지 않을 지경. 사실 고문이라는 행위는 그 피해자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하겠다는 의도가 주가 아니라, 육체적 고통을 통해 이성을 해체시켜 버리겠다는 의도가 주된 의도였던 거다. 


사람을 동물이지 않게 만드는 그것, 오랜 시간동안의 의지와 판단으로 이루어온 개인의 이성이자 자아. 고문은 이런것들을 지워버리고, 시키는 말을 고분고분 따라하게 만드는 앵무새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 이성이며 자아를 위해 목숨마저도 바칠 수 있는것이 사람이거늘 고문 가해자들은 오히려 죽음이라는 샛길로 빠져들지 않게 먹잇감을 요리하는 프로들이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앵무새의 길로 접어들게 되면 자신의 목숨과도 같았던 이성과 자아가 볼품없이 허물어진 후유증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 고문 피해자 였던거다.






그럼 그동안 고문을 다루어온 극 들의 '성의없음'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걸까? 글쎄...무엇보다 '그 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라고 생각했던게 아닐까? 조금 멀리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고, 그나마 최근에는 독재 권력에 맞서던 민주화 운동의 인물들이니. 한국 역사에 있어서 감히 생채기를 내기 어려운 '권위'를 갖게 된 그들이 '나약하게 굴복하고 말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생생하게 재생하기란 어려웠던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각주:1] 많은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가족에게서 잔정을 느낄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희생의 고결함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그 희생이 얼마나 파괴적인 것이었는지 들여다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직접적인 사회 고발 영화의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정지영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대선 결과에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각주:2] 물론 이같은 고문 및 폭력의 가해 당사자라 할만한 세력들이 아직까지도 별 탈없이 잘 지내고 있고 이른바 보수 세력의 주요한 한 축이라고 나 역시 생각하고 있다. 다만 폭력이라는 보다 일반론적인 공론장에 있어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 극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실존 인물들의 실명을 쓰지 않으면서 단지 '김근태'와 '이근안'의 문제로 한정지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 처럼 말이다. 


설익은 내 짐작에 의하면 이 영화 역시나 '부러진 화살'과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특정 부류에 대한 비난을 가하는데 끊임없이 소환 될거라고 본다. 물론 필요한 부분이다. 그들은 아직도 단죄되지 못했으므로. 다만 비난에만 매몰되는 자세는 고문을 '성의없이' 다루었던 사람들의 실패를 답습하는 꼴이 아닐까? 예컨데, 이 영화를 보고 故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일대기를 읊으며 그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과연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체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안타까움을 느끼며 반대에 나서는 부류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물론 독재 권력 아래서의 고문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체벌을 같이 놓고 본다는 것 역시나 타당 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단지 나는 한사코 애국을 입에 달고 살았던 고문 가해자들이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 수사를 동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정말로 그것이 애국일 수도 있다. 마치 우리가 '교육적'인 목적으로 체벌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정말로 진지했다고 생각한다. 시종일관 발가벗겨진 김종태 처럼 이 영화는 꾸미거나 덧붙이는 것이 없다. 주제를 놓고 무서운 집중력을 보이며 여러 측면에서 진일보한 결과물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이렇게 진지한 영화는 보는 사람들도 진지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누군가를 씹어 돌리는 건덕지로만 활용하기에는 너무나 미안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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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뷰 베스트에...













  1. 다른 나라의 영화들에서도 대부분 고문은 '권위'를 가질 만한 '영웅'들의 일이라 비슷한 약점을 지닌다고 본다. [본문으로]
  2. 이건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듯. "대선에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는 소리는 어느 특정 후보가 유리하도록 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후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진심으로 뭔가를 깨달아 이런 과거가 되풀이 되선 안 된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깨닫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대선에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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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얼마전에 있었던 초등학생 체벌 관련 뉴스가 있고난 후 해묵은 논란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 모양입니다.거기에 한마디 거들고자 합니다.일단 저는 체벌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얼마만큼의 강도에 의한 것 이건. 

이유는 크게 두가지.

1.문제해결에 폭력이라는 수단을 배우게 됩니다.
 
 갈등 상황이 생겼습니다. 선생님과 학생의 의견이 다릅니다.물론 훨씬 많은 교육을 받았고 인생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도 월등한 경험을 한 선생님의 판단에 따르는 것이 보다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학생에게 이해를 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배운다'라는 것이고 그렇게 '배우도록 '도와주는 존재가 선생님입니다. 왜이런 방식을 따라야 하는지 말하는 사람과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상황에서 아픈것을 피해 행동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터 갖추는 능력입니다. 체벌을 행사하는 사람과 체벌을 당하는 학생이 그 이유의 일치를 못보는 상황이라면, 학생이 체벌을 견뎌야하는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한쪽이 더 우월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자, 학생에게 갈등 상황이 생겼습니다. 또래와의 갈등에는 내가 더 우위에 있습니다. 키도더 크고 싸움도 더 잘하기 때문입니다. 아는 형들도 있어서 쉽게 덤비지도 못하는데 뭘 모르는 애가 하나 걸렸습니다. 상황의 전후 사정이나 옳고 그름의 당위성은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내가 더 우월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맞을때는 전후 사정이나 당위성에 의해 맞을 상황이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나의 판단 아래서는. 난 그저 우월한 권력을 지닌 대상에 맞았을 뿐이고 내가 보다 우월한 상황에 놓였을 때 그대로 때릴 뿐입니다.
 갈등 상황이 또 생깁니다. 이번엔 학교 주변 골목길에서 생긴 모르는 아저씨와의 갈등입니다. 담뱃값 10원하나 보태준적 없으면서 남의 흡연권을 침해 하려고 합니다. 어랍쇼,그런데 덩치도 작은게 힘도 못쓰게 생겼구만 어른이랍시고 고개가 제법 빳빳합니다. 혹여 부모님과 안면이 있는 동네 주민이라던가 먼 친척 뻘인 사람이라면 추후에라도 내 신변에 영향을 줄 수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면 단지 나이가 많은 것이 권력의 우월함이 되지 못합니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 얼굴도 못알아 보게 어두 컴컴하면 힘센놈이 우월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우월한 존재는 우월하지 못한 존재와 타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저 우월한 존재가 되면 다 해결이 되는 아주 간단한 구조.벌써 머리에 입력 완료 되었습니다.

도덕? 철학?  해서 아픈거는 피해가고 안아픈것만 따라 가는데 도덕이며 철학이며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가 있을까요? 참 그넘의 폭력영화,만화,게임은 씹어도 씹어도 아직까지 단물이 계속 나오는 모양입니다만 대한민국의 학생들, 배운데로 말 잘~듣고 있는겁니다. 학교에서 뭘 배웠느니, 학교에서 국영수만 가르치고 도덕과목은 천시하니 애들이 배운게 없다느니 하는 말은 이제 좀 킵해두심이 어떨지...


2.사랑의 매? 왜 학생 주임 선생님은 수학 선생님보다 학생들을 더 유별나게 사랑하시는 거죠?


 요즘도 유효한 지침인지는 몰라도 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무슨 공문같은게 내려와서 (공문이라고 쓰고 화장실 휴지 대용이라고 읽습니다...철지난 말투를 잠깐;;) 매에도 규격을 정해서 쓰라는 말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똑같은 규격으로 때리면 그 효과가 동일하게 나타나기라도 한다는 기대 였을까요? 뭐 그렇던지 말던지 대뿌리에 부러진 당구 큐대에 널빤지 자체 제작품까지 개성 만점의 '사랑의 몽둥이'들을 들고 다니셔서 그 '규격 몽둥이'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기는 했습니다.

자..여기에 다시 갈등 상황이 생겼습니다. 아차차..교칙을 어기고 학교 운동장에 슬리퍼를 찍찍 신고 내려갔던 홍철,재석,명수는 각기 다른 선생님에게 걸렸습니다. 천사같은 국사에게 걸린 홍철은 가볍게 꿀밤, 오늘따라 기분 안좋아 보이는 수학한테 걸린 재석은 몽둥이가 두대, 살아있는 전설 영어에게 걸린 명수는 그자리에서 종아리에 아디다스 삼줄이를 그렸습니다. 학교 운동장에 슬리퍼를 신고 가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어긴 건 똑같은데 그 결과는 제각각이군요. 
 
똑같은 잘못을 하더라도 그 처벌이 똑같지 않다면 그 처벌에 어떤 교육적 효과를 기대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처벌 당하는 학생은 처벌을 주는 선생님의 의도와 일치된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 일일이 몇대를 때릴지 정하면 되지 않을까요? 몽둥이의 규격을 똑같이 정한 것 처럼요.  만약 그렇다면 요즘들어 테니스에 부쩍 취미를 들리신 체육선생님만 피하면 다 나름 견딜만은한 몽둥이 세대가 되겠군요. 똑같이 종아리 세대를 때려도 다른 선생님들은 하루저녁 자고 일어나면 멍자국이 다 없어질 만한 강도로 때리는데 팔뚝에도 잔근육이 자글자글한 체육선생님은 이틀째 저녁이 되도록 욱신욱신 자국이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으니...뭐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선생님들이 똑같은 강도로 매질을 하도록 훈련을 시키려다가는 야구 국대 일번타자 만드는 훈련이 될 정도이니 이쯤에서 타협할만도 하지요. 비오는 날이면 기분이 좋아서 1+1도 4가 되고, 키작은 국사 선생님에게 배우면 조선을 건국한 왕이 의자왕이 되는것이 교육이라면 말이죠.



 





 최근 체벌에 관한 논박 글들을 보면 체벌에 대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교사들의 업무 환경, 성적에 목을 메는 교육열, 단체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외동아이들..등등. 물론 무슨 공자님 말씀같은 대한민국의 개선된 교육 환경을 내일아침 까지 떡 하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현실적인 타협이라는게 필요 하다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손바닥 한대라서, 맞아도 안아픈 엉덩이라서, 쑥쑥 자라는 애들 이것 맞고 골병드는게 아니라서 때리는 한대 한대가 얼마나 무겁게 선생님의 손을 떠나는 것인지는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잠시 흔들리더라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폭력은 안된다는 것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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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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