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072017  이전 다음

  •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  

이런 감상 마저도 이미 꽤나 오래전 부터 있어 왔지만, 점차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점점 더 참지를 못한다. 공중전화를 지금보다 많이 사용하던 시절엔 더운 여름에 전화를 오래 쓴다고 폭력을 휘둘렀다는 뉴스가 종종 나오곤 했다. 지하철에서 갈등이 생긴 청소년에게 노인이 폭행을 당했다는 뉴스는 그 보다는 더 최근의 일인듯 하다. 이제는, 여자친구 아버지라던지 직계 가족간에도 칼부림이 일어난다. 그저 오다 가다 만나는 사이에 한순간의 흥분이 사고를 일으킨다기 보다, 비교적 긴 시간을 두고 지내는 관계에서도 끓어오르는 순간을 넘기게 하는 완충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비교적 사소한 말한마디 행동 하나에 '욱'해서 무려 살인이 날 정도라니 그 지경이 되도록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었던 걸까. 


분노의 에너지가 너무나 넘쳐나다 보니 어떤 사안에 대한 판단 역시나 누구에게 분노할 것인가로 귀결되곤 한다. 심지어 스스로 정의를 논하고 있으면서 그 행동은 그저 특정 대상을 향해 분노하는 것 밖에는 하지 않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이 하는 말처럼 분노는 모든 감정의 최우선인 듯. 일단 분노하고 나면 다른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지는가 보다. 그러나 분노가 넘실대는 현실에 대해 시의성을 놓고 논한다는것도 좀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 부터 누군가에게 분노하며 살아왔다. 그 중에는 힘없는 존재들을 소환해 괴롭히며 안정감을 찾았던 사례들도 수도 없이 많다. 다만 그 대상이 공동체를 담보하는 최소한의 구성원에게 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인식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 영화는 개인이 분노를 느끼는 지점에 대해서 탁월한 묘사를 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네 남자의 세계관에서는 모두 나머지 셋이 죽어 마땅한 나쁜놈이다. 심지어 나쁜놈 주제에 반성 할 줄도 모른다며 훈계를 늘어 놓는것도 닮아 있다. 그 와중에 불법으로 몰카를 찍고 도,감청을 한 남자와 집착하는 전남친과 사채업자와 그 사채업자가 소개시켜준 대학교수는 중심 사건인 여대생의 피살에 견고하게 얽혀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는데 매개체가 되어준다. 그럼에도 그들 자신은 왜 자기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며 용서조차 빌지 않는 그들을 조소할 뿐이다.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


이 영화의 미덕은 그 갈등 관계를 어느 한쪽의 처짐없이, 심지어 복잡하지도 않게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제 3자의 입장에선 모두 여대생의 죽음에, 혹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용하기에 일조를 한 존재들이지만 그 각자의 입장에 상대에게 분노하는 지점도 전혀 외면할 수는 없다. 어느 한 사람조차 어거지로 감정선을 끌고 가지 않기에 영화를 보는 제 3자는 어느 순간, 스스로가 분노했던 순간을 문득 문득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짓게 된다. 한 사람의 죽음과 그에 얽힌 네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아귀가 잘 들어맞도록 만들었다는건 분명히 큰 성취라고 본다. 거기에는 각각의 인물의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구성도 한 몫을 했고. 한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 되다가, 마치 옴니버스 영화에서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듯이 숨을 고를 타이밍[각주:1]을 준 후 전혀 다른 인물의 다른 감정선이 시작되니 그 개인의 사정에 각각 집중할 수 있게 되는거다. 


거기에 최근에 제 몫 이상들을 충분히 해 주고 있는 배우들이 면면에 포진하다 보니 의외로 다들 복잡한 인물들의 면면이 제대로 구현 되었다. 특히 사채업자 역할의 조진웅의 활약이 백미인데, 겉으로는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 애쓰면서 순간 순간 무지비한 폭력을 휘두르는데 거침이 없는 악인의 캐릭터를 제대로 살려냈다. 이제 껏 보지 못했던 악인의 묘사에 박수를. 그러나 영화 전체의 성격에 대해 평하게 된다면 뭔가 어중간 하다는 느낌도 든다. 그저 사회 부조리 극, 우화 정도르 생각하기엔... 아니 뭐 부조리 극, 우화의 목적으로 영화가 만들어 진다는게 잘못은 아니지만 기세 등등한 '죄수들'과 '첩보원들',무시무시한 '조폭들'사이에서 얼마나 자리를 보전하게 될지 염려가 된달까? 미스터리가 좀더 가미된 추리극 정도가 되었다면 좀 더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을 거 같기도 한데;;; 뭐 그랬다면 너무 복잡한 이야기가 되거나 오히려 너무 뻔한 극이 되어 버렸을 수도;;;














<위의 사진, 동영상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원작자에게 있습니다.>








  1. 기계 구조 안에서 인물들이 있는 넓은 공간으로 시야가 나가는 장면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어린쥐™

욕먹는게 일상이었던 김기덕 감독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난 후 졸지에 '국위 선양'한 대단한 감독이 되어 '온 국민이 사랑해 줘야 할' 감독이 된듯하고 , 봉준호나 박찬욱 김지운 감독들은 심지어 헐리우드와의 협업을 통해 '국위선양 감독'의 대열에 올라설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위의 감독들 모두 대단한 감독들이고 나도 재밌게 본 영화들이 많다. 다만 위의 감독들이 한국에 있어서 참 다행인 것 만큼이나 나는 '신정원 감독'이 한국 영화계에 있어서 다행이다. 심지어 '도둑들'같은 영화가 천만 스코어를 찍는 이 시국에 이 재기발랄한 병맛 코드를 꿋꿋하게 보여주는 신정원 감독이란 존재는 아니 소중 할 수 없지.


 




먼저 '병맛'이란 단어에 대해 낯 선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이 설명이 먼저 있어야 하겠다. 애초에 '병신같네'라는 아주 거친 단어로 표현하던 의미가 채팅창 필터링을 피하는 과정에서 '병삼같네'로 표현이 되기 시작했고, 많은 인터넷 신조어가 그랬듯 오타가 주는 재미로 인해 '병맛같네'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것이다. 그러니까 어처구니 없는 바보짓이 만들어 내는 웃음, 혹은 어처구니 없는 바보짓 그 자체가 대충 병맛의 의미가 되겠다.


가깝게는 uv가 만들어 내는 컨텐츠들이 이 병맛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 컨텐츠들이고, 그 이전에는 싸이 정도가 있었다고 볼 수도. 해외로 눈을 돌리면 이미 '소림축구'와 '쿵푸허슬'로 정점을 찍고 후속작을 못내놓고 있는 '주'님이 있고 미국에는 그 이름도 찬란한 '잭 블랙'이 있다. 그런데 이 병맛분위기란게 까다로워서 뭐 아담 샌들러까지도 괜찮지만 짐 캐리까지는 아니다. 웃기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를 떠나서 코믹한 코드가 주어지는 상황의 의외성이 문제가 된다. 마치 자기는 전혀 웃기려는 의도가 없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서서 배꼽을 빠지게 만드는 정도의 의외성 말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듯 하면서도 각자 다른 분위기를 내는데 능통한 신정원 감독에게 있어 이 의외성의 코드는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훗날 밀본의 캡짱이 되어 세종을 쥐락펴락하게 되는 윤제문에게 기저귀를 입혀 괴롭혔던 차우의 엔딩을 기억하는가? 사실 멧돼지도 다 잡혔고, 동네 미친여자는 그대로 하나의 배경처럼 지나갔어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동네 미친여자가 진짜로 무서운 존재였고, 상 남자였던 윤제문을 아이어르듯이 갖고 노는 상황이란 그야말로 반전. 이 뜬금없으면서도 우스운 이 영화의 개그 코드는 과연 이 영화가 망작인가 걸작인가에 대한 논란을 불러올 정도였다. 


이런 의외성이 돋보이는건 의외의 상황으로 웃음을 주기에는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울진리라는 바닷가 마을에 알 수 없는 사고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의 점쟁이들이 다 몰려가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루는 이 영화에도 한편에는 귀신이나 원혼들이 등장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는 각종 찌질한 군상들의 코미디가 펼쳐진다.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영감 말투의 초딩 도사가 "도무지 답이 안보여"라며 좌절하는건 수학 학습지 앞에서 이고, 수련을 통해 솔잎 하나로도 충분히 배가 부르다는 '박선생'은 몰래 초코파이를 먹는 현장을 들키지 않기위해 고군분투 한다.   


물론 이 영화 역시나 차우때와 비슷한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다. 재미있다는 사람은 웃겨 죽겠다는데, 아니라는 사람들은 도무지 어디에서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아쉽지만 이런 코드는 안웃기다는 사람앞에서는 답이 없다. 그래서 어떤 이유들로 인해 이 영화가 재밌는 영화라고 쭉 늘어놓아 봤자 별로 영양가 없이 기운만 빠질 뿐. 단지 운 좋게 나는 신정원 감독에게 '접신'을 했고, 차기작을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리겠노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1. 배우 강예원의 백치미는 이미 일정 단계를 넘어선 듯함. 

    살짝 벌린 입에 진지한 표정이 가진 포스는 김정은의 로코 퀸 전성시대의 포스를 보는듯 했음.


#2. 배경은 겨울인데 개봉이 가을 쯤인걸로 봐서 개봉까지 우여곡절이 좀 있었던것 같음.

     그 와중에 곽도원과 이제훈의 대 폭발이 한층 힘이 되지 않았을까?

     

#3. 차기작 '더 독'에는 차우의 엄태웅, 점쟁이들의 곽도원에 한예슬이 캐스팅 되었다고;;;

      이 조합은 뭐지?ㅋㅋㅋ














<위의 사진, 동영상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원작자에게 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어린쥐™

그 시기를 지난 '어른들'에게는 스무살에 대한 환타지가 있다. 그렇게 '풋풋'이니 '파릇 파릇' 이니 온갖 좋은것들을 다 가져다 수식을 하는 통에 정작 직접 겪어내는 스무살은 누군가 멋지구레하게 꾸며 놓은 이미지 속에 취해서 보내는 경우가 많다(라기 보다 나는 그랬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대단할 것도 좋을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중닭'같은 시절이었달까. 귀엽지도, 멋지지도 않은. 지금 열심히 스무살 환타지를 퍼다나를 그대 '노계'들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당신의 스무살의 사랑은 ' 말한마디 못하고 끙끙대다 선배에게 하이재킹 당하는 시퀀스'에서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아. 이 어중된 중닭같은 청춘,사랑이여.





영화의 줄거리는 사실 별 새로울게 없다. 누구나 다 엇비슷하게 갖고 있을 만한 첫사랑의 이야기, 그리고 그런 첫사랑과의 십수년만의 재회. 그러나 이 영화는 '스무살 환타지' 속에서  중닭같은 어중 됨을 오롯이 살려 냈다는 점에서 새롭게 다가온다. 그런 노력으로 인해 이미 '어른'이 된 위치에서 '스무살''첫사랑'하면 거의 기계적으로 보이는 반응을 넘어선 어떤 새로운 반응을 사람들로 부터 불러 일으키게 만든다. 말하자면 마음 한켠에 숨겨 놓았던 '과거 사진'과도 같은 기억이 스멀 스멀 드러나는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 반가움? 

더불어 인상적인것은 그런 '로맨스'를 풀어 놓는 과정에서 활용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은 로맨스를 넘어선 더 큰 이야기도 함께 전달해 주는데, 그건 오히려 대놓고 설명해 주지 않는 부분이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더 깊숙히 젖어들게 만드는 면이 있다. 말하자면 점점 희미해 지고 있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에 대한 아쉬움과 같은 그 무엇을...

승민(이제훈, 엄태웅)과 서연 (수지, 한가인)의 사랑의 감정은 둘이 자리하고 있는 공간과 함께 진행 된다. 우연하게 같은 수업을 듣게 된 둘이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가, 서연이 재욱 선배(유연석)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같이 살던 동네를 떠남과 동시에 승민과 서연의 관계도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더불어 십수년 후의 이별의 과정에도 더이상 서로에게 다가 설 수 없는 상황이 승민이 멀리 해외라는 공간으로 멀어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여건상 서연의 집 증축을 승민이 맡아서 하기 힘들어진 상황에서도 승민이 마무리를 짓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것 역시나 둘의 감정을 어떤 식으로던 마무리 짓고 싶었던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도 있다. 그리고 집이 완성되면서 둘의 감정 역시 최고조에 이르게 되는거다.

사람의 감정이란 이처럼 물리적인 어떤 것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물리적인 어떤 것에 의해 기록 된다. 그리고 물리적인 어떤 것에 의해 좌우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 수록 사람들은 물리적인 어떤 것과 감정을 분리 시켜나가는 쪽으로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게 음악을 담는 매체가 씨디에서 mp3파일로 바뀌는 부분이라면 그저 익숙한 취향의 문제 일수도 있겠지만, 그 변화는 점차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있어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 되고있다. 
 십수년 후의 사람들이 십수년 전의 지금을 추억하게 된다면, 과연 그 기억에는 어떤 공간들이 남게 될까? '스타벅스 정릉점'을 승민과 서연의 '폐가' 처럼 기억해 줄 사람이 있을까? '스타벅스 정릉점'이라는 공간은 그 때까지 같은 자리에 남아있기는 할까?  '폐가'가 남아있는지 여부는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으니 모를 일이지만 최소한 건대점이니 홍대점이니와 비교해 정릉점이라는 특징이'폐가'처럼 기억에 남길 만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만약 서연이 승민에게 전해준 것이 전람회 씨디와 씨디 플레이어가 아니라 이메일로 보내준 음악 파일이었다면 그 음악에 두 사람의 감정이 실려 보관 되었을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것 처럼. (물론 자신만의 '폐가'를 발견하게 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이 지점에서 발견하는 '감수성'은 더이상 어떤 취향이나 유희의 측면에서만 거론할 성질의 것이 아닌것이다. 사랑을 줄 수 없는, 감정을 내어줄 수 없는 공간에 둘러싸인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고 감정을 교류할 수 있을까. 왜 우리가 이렇게 삭막하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 불평할 때 '집'과 '집값'을 거의 동의어에 가깝게 활용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왜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걸까.








#1. 이 영화에서 '90년대'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위한 배경의 측면일 뿐 아니라, 지금 보다는 아날로그가 살아 있었던 시절이라는 점에 있어서 촘촘하게 설명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 영화는 그것을 잘 해낸것으로 보이고. 그것과는 별도로 90년대가 벌써 추억의 한 귀퉁이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에서 약간의 쇼크가;;; ㅎ

#2. 이 글을 쓰면서 '어중띄다'라는 말이 표준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됨;;

#3. 애인의 아는 (이성) 친구는 본능적인 경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 


   <위의 사진, 동영상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명필름 '에 있습니다.> 


                                                        다음 뷰 베스트에 올랐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어린쥐™

 

기태(이제훈), 동윤(서준영), 희준(박정민)은 친구사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기태는 죽었고 희준은 전학을 갔으며 동윤은 기태의 장례식에 조차 오지 않았다. 그리고 기태의 아버지 (조성하)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고자 기태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여기서 이 영화는 그저 말 한두마디로 쉽게 기태의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듯이 세 소년이 서스럼없이 친했던 순간과 우정이 깨져 파국에 이르렀던 순간들을 두서없이 드나들며 미스테리의 끈을 놓치 않는다.




이 영화는 고등 학생 세 소년의 이야기다. 역할을 맡은 실제 배우들의 나이는 모두 성인이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고등학생의 외연에 어떤 이음새가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만큼 극 속에서 이들이 사용하는 어휘나 행동들은 딱 그 또래의 그것이며, 성인의 시선에서 재구성한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썩 괜찮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이 극은 누가 봐도 고등학생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극은 세 소년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여타의 고등학생 시절을 다루는 영화에서 다룰법한 요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성적 문제, 학교나 가정의 억압 등등. 그런면에서 보자면 또 이 영화는 전형적인 청춘 성장영화의 구분에서는 두 발짝 정도 벗어나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성장 영화에 방점을 찍지 않는 다면 이 영화의 메세지를 구분하는 범주는? 아마 '오해가 이루어지는 과정' 쯤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극중에 친구들끼리 쉬는 시간에 모여앉아 얘기를 나누는 중에 '요즘 중학생'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사실 지어냈을 정황이 큰 이야기 였지만 대충의 내용은 '요즘 중학생들 무섭더라...여자애들까지 끼고 담배를...한번 쳐다봤더니 막 덤비는데...그 수가 일곱명정도는 되어서...' 였다.  사실 자신들도 대외적으로 담배며, 여자 친구며, 무분별한 폭력이 허용된 존재들이 아님에도 그런 규율을 어기고 살고 있는 이 '고등학생 형들'은 중학생들은 아직 담배며 여자 친구며 폭력성을 감히 드러내서는 안되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한 때의 치기, 혹은 아주 정상적이고 때로 긍정적이라고 까지 할만한 성장통,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고통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어른들'이 열 일고여덟의 방황을 제 멋대로 아주 낭만적인 이미지로 덧씌워 버리듯이. 자신도 제 앞가림을 다 못하고 살면서도 열일곱의 '아이들'의 고민에서 해탈한 양 설교를 늘어놓을 사람들이라도 한눈에 알아 챌 수 있는 원초적인 비극의 씨앗이, 그러나 이들, 아이들 사이에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둘도 없이 친했던 친구들이 어떻게 서로 때리고 맞고 상대를 죽게까지 만들었는지 그 여정을 따라가 본다면 그 과정의 어이없음에 실소가 나올 지경. 그러나 마냥 그들을 비웃어 버릴 수 없다면 그것은 과거 자신의 모습이, 혹여 지금도 이 소년들 처럼 사람 사이에서 괴로워 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기 때문이리라. 
 

주목 받고 떠받들여지고 싶으면서도, 같이 가고 싶은 욕망.
그 팽팽한 자기장 사이에서 흔들리는 바늘.


  왜 일이 이렇게 된건지,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에 대한 해답은 그 말을 꺼내는 기태 스스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알면서도 그렇게 끌려갈 수 밖에 없었던 불가항력에 의한 괴로움을 그런식으로 표현 했을 뿐.








#1. 왜 제목이 '파수꾼'인가는 별도의 소개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은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생각이 오해를 낳게 되었고 그 결과로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2 '친구사이?'에 기태역의 이제훈이 나왔었다니. 이제 짜맞춰보니 기억이 나는것도 같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어린쥐™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