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072017  이전 다음

  •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  




루카스는 유치원 교사다. 그는 고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부분 오랜 친구들의 아이들이기도 하다. 영화는 초반에 마치 철 안든 소년의 장난끼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듯한 이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한가를 자연스럽게 묘사하는데, 이들 사이의 균열이 일어났을 때의 파장을 더 크게 느껴지도록 하는 장치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균열이라는 것은 너무나 우습고도 무섭게 다가오게 된다. 이리저리 널을 뛰곤 하는 한 아이의 생각속에 어느 한 순간 루카스가 남자로 보였고, 짐짓 냉정한 태도의 루카스에게 상처를 받은 아이의 비뚤어짐이 이 사단을 일으키게 된거다. 단지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접한 우연을 루카스에게 투영한 이 아이의 발언은 루카스를 소아성애자로 만들고 만다. 이 후로는 아이들을 위한 루카스의 선의에 의한 행동 조차 악행의 근거로 소환되는 지경.


사실 난 루카스가 오해를 받게 되는 지점에 쉽게 동화 될 수 없었다. 아이의 발언은 어떠한 정황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할 만큼 흐릿했고, 그럼에도 정식으로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사람들은 루카스를 단정지어 버렸다. 자신의 아이가 성 학대를 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사리 분별에 방해가 되었을까? 루카스는 왜 그런 유치원 원장이며 주변 사람들의 행패에 그저 당하고만 있을까? 이 중에서 루카스가 왜 이런 부당함을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까 하는 의문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법적인 판단을 받고 난 이후에도 사람들의 의식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부당하게 자신을 모욕하고 해고를 한 원장을 고소한다고 해서, 승소 한다고 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질리가 없었던 것. 루카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고향과 주변 친구들은 그에게 무차별적인 증오를 표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고향과 주변 친구들로 인해 확인할 수 있었던 루카스의 자아는 그만큼이나 무너져 내려 버린것이고, 그건 소송으로 회복 할 수 있는것이 아니었던 거다.


영화의 초반 장치들에 쉽게 동화되지 못한 결과를 영화 외적으로 짐작해 본다면 아마 나 역시도 전혀 이성적이지 못한 이성적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이성理性'에 대해서 뭔가 특허라도 낸듯한 이미지의 유럽, 그 중에서도 복지국가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북유럽 아니던가. '그렇게 훌륭한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저렇게 비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가 아마 내가 가진 잠재의식이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그들의 비이성이 표출되는 부분인 '아이들에 대한 신뢰' 역시 내가 살아온 문화권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기에 낯설었을 수도. 루카스에게 부당함을 안기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아이는 거짓말 하지 않아' 인데, 이건 마치 '노인의 지혜'에 절대적인 권위를 안겨주고 있는 (혹은, 안겨주었던) 한국의 문화와 그 모양은 같지만 그 대상은 정 반대의 것이었다. 아이의 발언에 대한 신뢰를 인정해 주는 과정에서 어른의 반론에 대한 무차별 적일 정도의 공격은 내가 이제껏 접하지 못한 것이었으니.[각주:1] 이런 갈등 상황도 한국에서는 대부분 어른들의 권위가 아이들의 정당한 요구나 발언을 묵살하는 모습으로 표출되는 것이 익숙한 일이지 않은가. 영화에서도 대부분 어른의 권력에 의해 아이의 진실이 억압받는 식으로 다루어지곤 하고. 이 두 문화권의 차이도 흥미롭게 본다면 참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다시 영화의 내용으로 돌아와 본다면, 이렇게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인식한다고 해도 그 대안이 없기에 이런 문제제기가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기엔 너무나도 두렵고 그래서 그 불합리함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는 부분을 자꾸 지적하니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거다. 이 대목에서 진짜로 아득한 갑갑함이 몰려오는 것은 이 싸움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점 때문이다. 다수의 안정을 위해 불합리하게 그저 '합의'하고 있는 사안에 걸려든 개인의 고통,안정을 위한 불합리가 합리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괴로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환기가 이 영화가 말하려는 핵심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위의 사진, 동영상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원작자에게 있습니다.>







                                                             다음 뷰 베스트에 올랐슴다.



  1. 생각해 보면 아이의 사랑고백에 루카스만큼 정색하고 반응 한다는 것도 일맥상통의 상황이다.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어린쥐™

인간의 이성은 '아이러니'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고, 그런 아이러니가 아니라면 설명 하고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그 아이러니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들은 과연 인간의 이성으로 그 실체를 파악한 범주에 포함시켜도 좋은 걸까? 그 자신만만한 이성으로도 분석하기에 한계가 느껴지는 것들을 모조리 모아서 덮어두고 '이건 참 아이러니하군'하고 넘어가는 거잖아. 마치 지금 이순간에도 우주를 향해 무한하게 뻗어가고 있는 원주율(π, Pi)의 소수점 아래 숫자들을 대하는 것 처럼.





파이의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인도의 동물원 사업을 모두 접고 캐나다로 떠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파이의 가족은 결국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서의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밖에나가 구경을 하겠다는 철없었던 파이는 살아 남았고, 폭풍을 무서워 할 줄 알아야 한다며 곧바로 다시 잠에 빠져든 형을 비롯한 가족들은 살아 남지 못했다. 그렇게 바다 한가운데 홀로 표류하게 된 파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게 끊임없이 자신을 해치려 하는 '리차드 파커' 덕분이었다는 것은 이 아이러니한 상황들 중에서도 압권. 


이 상황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파이가 종교를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이 작품은 이성의 반대편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종교의 가치를 높이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는 냉철한 이성만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나 압도적인 곳이며, 맹목적인 믿음에 매달리기에는 지극히도 현실적인 곳이었다. 그 차갑기 이를데 없는 이성과 마찬가지로 알라나 예수의 아버지나 힌두교의 그 많은 신들 조차도 그 어느 하나 충분한 답안이 되지 못했다. 대신 단어 그대로 '발버둥'이라 정리해 볼 수 있는 파이의 안간힘이 그를 살게 했다. 어느 한 부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은 의지가 그를 살린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믿음이나 이성으로 한정지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깊은 것이었던 거다. 그 답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 속에서 만난 해답은 바다를 부유하는 정체모를 섬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때로 정처없이 떠돌던 고행에 쉼터가 되어 줄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안에서 머물러 지낼 수는 없는. 먹을 것과 마실 물과 아늑한 나무 등걸이 있어 떨치고 나서기에 어려움에도 우리는 살기 위해서 언젠가 그 섬 대신에 아무것도 확신 할 수 없는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그 섬이 제공하는 몇 덩어리의 나무 뿌리와 몽구스(미어캣이던가?) 몇 마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섬에 눌러앉는 순간, 그 사람은 섬의 제물이 되고 말기에.


이런 겸손을 불러 일으키는 영화의 힘은 압도적인 바다를 표현해낸 영상에 있다. 그 힘을 '영상미(美)'라고 하기에는 뭔가 적확한 표현은 아닐 것 같은데 그저 스크린 너머에서 간접 체험을 할 뿐임에도 영화속의 거대한 자연은 아름답다는 감상에 젖기 보다 경외감을 갖게 하기에 그렇다. 이 심심하기 이를데 없는 이야기로 거대 자본을 끌어들여 3D영화를 만들어낸 이안 감독의 의도가 비로소 이해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영상이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단지 뽐내기 위해 화려한 영상 기술들을 선보이는 여타의 영화들과 차별점이 있다고 하겠다.














#1. 나름대로의 영화 관람 철칙으로 인해 2D로 관람 했음에도 제법 앞자리에 앉아서 였는지 그 압도적인 영상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기회가 된다면 IMAX 3D에 도전해 볼 생각. 


#2. '엄마' '아빠' 가 여러 언어권에서 비슷하게 발음 된다는 세삼스러운 신기함이;;







<위의 사진, 동영상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원작자에게 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어린쥐™

Canon | Canon EOS-1D Mark III | Aperture priority | 1/50sec | F/2.2 | 0.00 EV | 50.0mm | ISO-1000 | Flash did not fire | 2007:08:20 17:42:39

(이 영화에 대해서 가장 먼저 밝힐 부분은 이영화는 스릴러가 아니라는 점이다.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하지만 원작 소설의 내용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예고 편만 본다면 딱 좀비 영화 비슷하게 보이던데;;;)

간단하게 줄거리 요약.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가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눈이 멀게 될 경우에는 온통 새까맣게 느껴지는것이 보통인데 이 환자는 온통 새 하얗게 보인다는 증상을 보였다.그리고 전염. 전염. 어떻게던 이 환자와 스쳐지나갔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 증상은 급속도로 퍼져 나간다. 결국에는 이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격리 수용하기에 이르렀고, 환자를 처음 진료했던 (역시나 같은 증상을 보이게 된)안과 의사와 어찌된 일인지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는 시작 된다.



인간의 이성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것으로 부터 시작 했다. 한번 본것이 시간을 초월하고 장소를 초월하고 대상을 초월해서 꾸준히 그렇게 보이면 그것이 참,진리. 아니면 잠깐 보류, 꾸준히 한번 본대로 계속 되지 않고 그 한번으로 그친다면 그건 그냥 말그대로 '한번'있었던일 땅.땅.
하지만 누구를 가릴것도 없이 모두 '보는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이 되자 더이상 '이성'도 불가능해 지고 만다. 보는것을 기초로 했던 인간의 이성,규범은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었고, 수용소에 서서히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류 전체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다.(서로 볼 수가 없으니 옷따위 신경 안쓰고 발가벗고 지내는 모습은 그런면에서 상징성이 참 큰 장면이었다.) 주어진 것이 극히 적은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지금까지 먼 선조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왔던 유산들을 다 '날려버리고' 다시 1막 1장부터 써 내려가야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1막 1장..... '어떻게 모여 살것인가'

먼 선조들이 그랬듯,일단 규칙이 필요했다. 줄을 이어 각 방을 연결하고, 어디에서 씻을지, 어디에다 배설을 할지,먼저 알게 되었던 누군가가 나중의 누군가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남에 대한 호의인 동시에 내가 먹고 자는 곳에서 남의 오물을 접하지 않기 위한 자기를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현명한 판단을 하도록 끊임없이 도움을 주는 '선지자'가 있었으니,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수용소 사람인 의사의 아내.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된 의사의 아내는 오히려 못보는 사람들보다 더 괴롭다. 상처에 댈 행주를 빠는데 녹물이 그대로 나오는걸 '본' 이상은 마음편하게 상처에 그 행주를 대줄 수가 없다. 씻어내야 하고 치워내야 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못보는 것들을 본다. 보는 이상은 그것을 치워내야할 몫은 의사의 아내에게 남는다.

1막 2장.....' 어떻게...살것인가'
모두가 보다 이로운 길을 일러 주었던 선지자의 말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급박한 생존의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이 되자 보다 많은 것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생겨 난다. 그가 가진 힘은 '권총'이었다. 3동의 지도자가 가진 권총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어서 이전에 수용소의 모든 기반을 닦아 놓았던 1동의 선지자(아내)와 지도자(의사)의 업적이 하루아침에 3동의 지도자의 발아래 떨어졌다. 간단했다. 총을 가진자가 명령한다. 안가진자는 따른다.  여기서 선지자는 한번더 괴롭다. 총을 가진자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알지만, 함부로 총 가진자를 해할수 없다. 이미 애저녁에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져간 양심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두머리를 해하게 되면 그 이후의 소요사태는 선지자라 하더라도 감당해내기가 어렵다. 없애는 것은 선지자의 몫이되, 그 이후의 소요사태는 온전히 나머지 일반 수용자들의 몫이다.




결국, 규칙을 만들어 지키고, 억압을 견뎌내고, 혹은 억압에 저항하는 것은 일반 수용자의 몫이었다.다만 선지자는 그보다 앞서 그 일을 '보고', '알' 뿐, 누구도 생지옥과 같은 현실을 혼자서 뚝딱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아무리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슬쩍 평을 보니 소설에 한참 못미쳤다는 평이 많았는데 이쯤되면 소설이 어느 정도 였는지 꼭 다시찾아보지 않을수가 없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 한편에 인류의 역사가 고스란히 다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물질'이며,'gender'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거리가 넘쳐났다... 특히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제대로 '보지'못한다면 자신의 처지가 얼마만큼이나 처참해 질 수 있는지...(딱히 수용소를 통제하는 군인들의 특징적인 모습만은 아니었다. 앞을 못보는 자의 차를 운전하고 있는 상황이 되면, 그의 면전에다 대고 조롱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차를 빼앗아 달아나는 것도 너무나 간단한 일이 되었다. 그말은, 나보다 더 많이 보는 사람이 나에게 대고 하는 일이고 내가 나보다 덜 보는 사람에 대고 하는 일이란 얘기..)



과연 나는.. 얼마나 보고 있을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어린쥐™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