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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테이크 쉘터는 마치 '에반 올마이티'의 히치콕 버전같다. 갑자기 현대의 노아가 되어 신으로부터 대 홍수에 대한 계시를 받은 후 지금의 삶이 피폐해 지는것을 감수하고 방주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그 이야기 말이다. 커티스(마이클 섀넌)도 비슷하게 악몽을 꾼다. 어느날, 누런색 비가 내리더니 개며 사람이며 모두 비에 맞은 존재들이 괴물이 되어 자신과 딸을 공격하는 꿈을 말이다. 악몽에서 시작 된 그 불안은 점차 환청에다 환영에까지 이른다. 그렇게 되자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커티스는 집 뒷마당에 방공호를 만드는데 집착하게 될 수 밖에. 가뜩이나 잔뜩 받아놓은 대출에 더 빚을 내고, 회사 기계를 마음대로 갖다가 쓰는 위험을 감수하며, 그로 인해 딸 수술을 위한 직장 의료보험마저 위태 위태 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방공호에만 집착 할 뿐이다. 도무지 자신의 행동을 그들에게 이해 시킬 수 없기에 가족과도 오랜 친구와도 그 관계에 금이 가는건 당연지사.


그 와중에 커티스의 불안을 좀 더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들이 있다. 관리가 어려울 정도로 불어난 주택 담보 대출이며, 유명무실한 의료 보험으로 인해 접하는 수많은 난관하며,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요동치는 기후등등. 오히려 커티스의 꿈속에서 그를 괴롭히는 '기상이변' 보다도 더 생생하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요소들 말이다. 그건 커티스를 포함한 극중의 사람들이 '지금'겪고 있는 불안 요소일 뿐 아니라, 스크린 밖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정권 안에 들어와 있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부러 이 요소들을 드러내지 않으며 마치 나는듯 안나는듯한 냄새처럼 이야기 속에 스며 들게 한다. 이렇게나 이 영화의 불안은 다층적이며 빈틈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차곡 차곡 쌓인 불안은 점차로 절정의 순간을 향해 간다. 미래를 위해 담보잡힌 지금은 더이상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균열이 심해져 가고, 미래에 대한 불안 증세는 점점 더 극심해져만 간다. 어느쪽에 의해서건 커티스는 부서져 버리고 말것이다. 단지 한 방향으로의 예외, 그의 불안 증세처럼 정말 세계를 끝장내 버릴 비가 내리고 그의 방공호가 제 기능을 하게 되지 않는 이상은. 그리고 결국엔 비가 내린다. 싸이렌 소리를 듣고 뛰어내려간 방공호 바깥의 비는 그저 지나가는 태풍일까, 아니면 커티스의 꿈에 나왔던 그 비일까? 뭐든 속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답답한 불안의 끝에 어느 쪽의 판단이 틀리게 되는가가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일 테지만, '과연 이 불안이란 놈은 쓸모가 있는 놈이야 아닌거야?'라는 의문을 넘어서 생각해 볼만한 지점이 있다.





불안은 미래에 대한, 혹은 미래를 위한 감정이다. 번지점프를 위해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올라가고 있는 '지금'은 사실 별 문제가 없이 안전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줄은 안전한 걸까?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 걸리는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마음 편하게 할 정도로 '지금'의 나를 위협하는 요소들은 없질 않나. 이같은 불안은 몇 분에서 몇십분 뒤의 일에 대한 대비로 현재의 평안함을 희생시켜가며 가지게 되는 감정이다. 그렇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고 있는 현재는 결단코 평안하지 못하다. 자고로 불안이란 사람을 피말리게 만드는 것이기에. 그 반면에 감정이라 하기에는 좀 다른 성격의 '긍정'이라는 것이 있다. 이 긍정적인 자세는 '지금'을 위한 일종의 처세다. 미래의 불안이 가지고 오는 지금의 괴로움과 미래를 맞이하는데 발생하는 부정적인 효과들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차원의 암시와 다짐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대처하게 되는거다. 이 긍정의 주요한 레파토리중의 하나는 과거의 성공 사례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 그 성공 사례를 따르면 미래에도 성공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러니 애초에 커티스와 그 주변 인물들이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것. 커티스는 미래를 얘기하지만 아내를 비롯한 지인들은 지금을 말하고 있었던 차이가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과거에도 이랬으니 미래에도 이럴 것이라는 나름의 논리를 갖춘 긍정족(族)들 사이에서 커티스는 자신의 망상 밖에는 증거로 내새울 것이 없고 그래서 모두가, 심지어 스크린 바깥의 사람들까지 그가 틀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질 적으로 누구 하나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것은 커티스의 불안이나 주변인들의 (비교적) 긍정적인 자세 모두 미래를 담보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안에 떤다고 미래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긍정적인 자세로 삶에 임한다고 미래의 불안 요소를 모두 이겨 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다면 사실 비슷한 답을 얻게 되는 것에 놀라리라 생각한다. 물론 확률적인 차원으로의 접근이나 어차피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할 미래이니 지금에나 충실하자는 걱정 무용론적인 자세가 이유가 되어 각각의 선택을 할 수는 있는것이나, 이 경우에도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지금의 불안에 대한 대처일 뿐 엄밀한 의미로 미래에 대한 대처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각각의 선택을 할 우리가 미래를 위한 대비로 이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지라도. 이 영화가 안겨주는 진짜 불안이라는건 이 부분이 아닐까? 결국은 당연한것으로 여겨지는 우리의 신념이 그저 신념일 뿐이라는...  



간혹 이런식의 영화를 만나게 되면 더러 짜증이 났었다. '사람들 하찮은거 저만 아는거 처럼 폼들을 잡고 그래..' 식의 생각이 드는것과 동시에 굳이 사람들을 괴롭게 만드는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던 거다. 반면에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최근에 야구 중계에서 접한 해설 한토막이 떠올랐다. '타격에 들어 섰을 때는 치겠다는 마음 50%, 참겠다는 마음 50%를 갖고 들어서야 한다'는 말. 애초에 미래에 벌어질 일을 100% 알아 맞춘다는건 불가능한 일이니 남은 것은 칠만한 공이다 아니다라는 판단을 미리 내리고 불안을 잠재우기 이전에 그 불안을 최대한 안고 가야 한다는 뭐 그런 의미의 말이었다. 그래야 예측이 빗나갔을 때의 당황을 줄여 좋은 타구를 날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그런... 믿음이 갖고있는 안락함에 취해 실체를 보려는 불안한 발버둥을 멈추지 말라는 그런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제서야 해 보게 된다. 저런 악취미를 가진 감독들의 의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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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일단 한 마디, 

이쁜 것들을 데려다 이쁜짓들을 시키니 이쁘지 않을 도리가;;;




 

이른바 청춘 영화나 성장 영화로 구분이 되는 장르에도 일종의 클리셰가 있다. 애들 같지 않게 일상어 같지 않은 어휘를 부끄러운 줄 모르고 쓴다거나, 뭔가 특출난 재능이 있다거나, 뭐 그런. 이 영화의 인물들도 괴짜같이 별 해괴한 짓들을 다 하고 다니지만 어찌어찌 졸업할 때가 되니 다들 명문대에 가게 되는 그런 노선을 따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점이 뭐 그런 큰 흠결은 되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그런 점들이 뭔가 더 특별한 영화가 되는데는 방해가 될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엇비슷하게는 겪어 봤음직한 '그 시절'의 파고는 두고 두고 곱씹어도 두고 두고 감정선을 건드리는 그 무엇을 갖고 있질 않나. 물론 충격으로 환영을 보기도 하는 찰리(로건 레먼)와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트려 온갖 추문을 안고 사는 샘(엠마 왓슨)과 동성애자로서의 고단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패트릭(에즈라 밀러) 만큼의 파고라면 누구나 겪어 봤음직한 상황은 아니겠자만 그 파도가 향해가는 방향성에 대해서라면 또 아니랄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이들은 'Nothing'이다. 이는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말꼬리잡기를 하다 패트릭이 얻게 된 별명인 동시에 아직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이들이 'Something'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대비해 스스로를 바라볼 때 갖게 되기 쉬운 자괴감의 꼬리표다. 혹은 학교에서 종종 열리는 댄스 파티에서 벽만 지키고 서 있는 'wallflower'들을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일 수도. 그 스스로도 괴로운 기억에 트라우마를 갖고 살고 있으면서 친한 친구마저 자살로 잃게 된 소심한 책벌레는, 남자들과 지저분한 추문이 끊이지 않았던 'X레'는,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X모 자식은' 타인에게 'Nothing'이다. 


그러나 이들의 내면을 알아주는 이에게 이들은 'Something'이다. 소심한 책벌레 찰리는 남다른 감수성으로 타인의 감성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아이였고, 어렸을 적의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해서 괴로워 했던 샘은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며, 게이라는 이유로 해서 많은 슬픔을 그저 가슴속에 품을 수 밖에 없었던 패트릭은 그럼에도 남들을 즐겁게 하려 애쓰는 이타적인 아이였다. 이들은 서로의 특별함을 발견해 줌과 동시에 자신의 특별함에도 자신을 얻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그들만의 터널을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낸다.


히얼 컴스 더 터널송



그렇게 유별날것 없어보이는 이 드라마를 반짝 반짝 빛나게 만드는 공로는 오롯이 배우들에게 가야만 할 것 같다. '케빈에 대하여'에서 사이코 패스 아들역할로 많은 사람들을 깜놀하게 만들었던 에즈라 밀러는 바스러질듯 위태로운 외향적인 게이 소년의 역할을 맡았고, 자존감이 부족해 질떨어지는 남자들과 추문에 얽히곤 하는 '소문 나쁜' 여자아이를 헤르미온느(헐미온? 헐마이온?)가 연기했으며, 어릴적의 괴로운 기억을 품은채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소심한 소년을 로건 레먼이 맡았다. 그야말로 화려하지만 내실마저 탄탄한 캐스팅. 엠마 왓슨은 별 무리없이 능숙하게 아역 이미지에서 벗어난 모습이고 나만의 믿고보는 배우 순위권에 위치한 에즈라 밀러는 몇 년뒤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가 기대되는 기대주로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로건 레먼의 경우엔 제대로 관심있게 지켜본 작품이 처음이라 가장 의외로 받아들인 경우였다. 이번에 알게 된건데 애쉬턴 커쳐의 출연작 '나비효과'에서 (말하자면) 어른 영혼을 가진 아이의 당찬(?) 연기를 선보였던 그 소년이 로건 레먼이었다네? 그 아슬아슬한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해낸 그 였기에 이 영화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둘 수 있었다고 뭐 그렇게 평하고 싶다. 이 셋을 보는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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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난 구멍을 고양이로 메꾸고,

어떤 사람은 구멍을 고양이로 메꾸는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어 메꾸고,

어떤 사람은 구멍을 고양이로 메꾸는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를 돈주고 보면서 메꾸고,

어떤 사람은 구멍을 고양이로 메꾸는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글을 쓰면서 자신의 구멍을 메꾼다.





위로는 내용이 아니라 그 어조가 중요하다 했던가. 마치 할머니가 손주에게 하는 말이 단어 하나하나마다 삶의 진리를 담고 있어서 소중한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마다 그 사랑이 담뿍 담겨있기에 소중한 것 처럼. 이 영화는 이런 '할머니의 화법'을 취하고 있다. 독특한 캐릭터의 여성이 나와서 독특한 행동들을 한다. 그녀는 크게 희열을 느끼며 사는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삶에 찌들려 괴로움을 겪는 것 같지도 않다. 심지어 같이 사는 가족도 없이,별다른 돈벌이도 없이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비교적 시골이라 유유자적 살 수 있는걸까?' ' 알고보면 쏠쏠하게 유산이라도 물려받아 저런 생활이 가능한걸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면 이미 그 순간부터 이 영화를 감상 할 기회는 없어진다. 그 존재의 이유를 유추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꾸준히 튀어 나오기 때문에. 차라리 이도 저도 다 포기하고 그저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 흐름을 따라가며 본다면 어느 순간 할머니의 다정한 말투가 생각나게 되는거다. 


 제목부터 고양이를 거론하고 있기에 애묘인들의 '약점'을 대놓고 공략하는 영화가 아닐까 의심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유리 풍경, 주인공의 고양이 대여를 외치는 독특한 억양처럼 미묘들의 애교는 일종의 소품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 잔잔한 풍경 소리와 피식 웃음짓게 만드는 독특한 호객 행위 억양이 세계 경제 활성화에 해답이 되어주지는 못하겠지만, 잠시동안의 따듯한 위로가 되어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마치 고양이들의 별 의미없는 행동 하나하나가 종종 큰 위로가 되어주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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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이 커플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마음을 먹는다면, 남자는 시청각 중복장애고 여자는 어렸을 때 척추를 다쳐서 보통 성인 키의 반절정도 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쓰게 될 확률이 높을걸로 본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하기 이전에 다르게 시작하고 픈 욕구로 한참동안이나 고민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랬듯이.




영찬과 순호. 이 두사람을 연결해 주는 의사 소통 방법은 점화(點話: 기존의 점자를 손등 쪽 손가락 위에 찍어 대화하는 방식)다. 순호가 영찬의 손가락 위에 점자를 찍어주면 어렸을 적의 기억으로 비교적 정확한 발음을 가지고 있는 영찬이 대답을 하는 식이다. 처음에 난 의문이 들었다. 저 둘은 서로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가지고서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걸까? 대놓고 속물 근성을 드러내 보자면- 여자가 얼마나 예쁜지, 목소리는 어떤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떤지, 나의 행동에 화내고 있는지 귀찮아 하는지는 알수가 없잖아. 단지 감정이 배제된 순수한 메세지 만으로 상대와 의사 소통을 하고 그 결과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걸까? 혹 누군가와 사랑하고 싶다는 어떤 욕구에 대한 자기 만족적인 감정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곧바로 난 헛웃음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보고 듣고 말하는데 무리가 없으면 상대에 대해서 다 알 수 있나? 모르고 사랑에 빠지는건 뭐 다 마찬가진데' 하는 생각이 그 뒤를 이었던거다. 인간의 행동의 가장 기본적인 동력은 별수 없이 자기 만족일 수 밖에 없는데 중복장애를 가진이의 사랑이라고 특별하게 색안경을 끼고 봐야할건 또 뭐란 말인가.  내가 영화를 보면서 내내 거리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건 이 커플이 대단한 닭살 커플이라서 였지, 장애인 커플이 '평범한' 사랑을 하는것에 대한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다.


더불어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 하나. 영화에는 이 둘의 첫 만남이 라면으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만 나와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감춰진 사실도 있는데, 순호의 자취방은 그렇게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고. 자연히 좁은 공간에서 뜨거운 라면을 먹게되니 땀이 많이 나게 될 수 밖에 없었고, 땀흘리는 영찬을 위한 순호의 선택은... 바로 '등목'이었다는 사실. love is touch, touch is love 는 역시 만고 불변의 진리 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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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자신이 층층이 쌓인 계급의 벽아래에서 허덕거리는 삶을 살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주말 저녁에 호프집만 돌아다녀 봐도 그런 세상에 대한 성토를 내뱉는 사람들이 태반임을 알 수 있을 텐데. 극이 '에잇 더러운놈의 세상~'하는 식으로 끝나지 않을까 싶었던 내 예감은 역시나 얼추 비슷하게 맞아 떨어졌다. 나는 이런 창작물들을 보면 '두드러기'가 나는 취향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적어도 자기는 이 세상이 더럽다는 말이라도 뱉어봤다는 공증이 필요한 사람들인건가? 아, 아직 세상이 더럽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 하면서 만족을 느낄 사람들을 위한 떡밥?  결국 창작물 일 뿐 그게 뭘 바꿔주지는 못하잖아. 근데 왜 저렇게들 목에 힘을주고 난리야?' 물론 사회성 짙은 창작물들에 대해서 모두 그렇게 여긴다는 것은 아니고, 나름 나만의 기준에서 볼 때 창작물로서의 완성도보다 가르치려드는 말이 더 우세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참 묘한것이, 그 '무거움'은 대놓고 무게잡기로 한 작품들 만큼이나 묵직하지만 가르치려 드는 꼰x 느낌은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지가 않은 점이다. 
  
어떤 이유에서 그랬을까? 중1소년 '김 철'의 이 세상에 대한 복수의 방법과 근래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개'들에게 대항하려는 '돼지'의 왕으로서 한계에 부딛치게 됨을 깨닫는 김철. 자신이 입버릇처럼 내뱉었던 괴물이 되기 위해서는 속세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임을 자신을 따르던 '정종석'과 '황경민'에게 털어놓는 순간 나는 카타르시스도 아니고, 잘못한 것을 들켰을때의 당혹감도 아닌 묘한 감정이 들었던 거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자신의 존재를 파괴하면서라도 '개'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려는 의도가 별 효용이 없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어떤 상징으로서의 파괴가 아니라 그것이 곧 현실이 된다면 그때는 조금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핍박하던 '돼지'들 중 하나가 그 고통을 토로하며 죽어간다 해도 그건 잊어버리면 그 뿐이지만, 더이상 핍박할 돼지가 남아있지 않다면 더이상 그들은 '개'가 될 수 없다는 생각.

김철이 핍박받는 부류를 '돼지'라고 칭한 선택은 탁월했다. 열과 성을 다해 살을 찌울 수 있는 환경은 그러나, 살을 얻고자 한 사람들이 구성해놓은 구조에 불과했던 것. 따르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는다는 협박은 더이상 돈을 벌기를 포기한 사람들 앞에서는 무력해질 뿐이며, 이미 삶을 포기해 버렸다면 목숨을 담보로 하는 협박도 더이상은 통하지 않게 되는거다. 만약 더이상 충분하게 살을 찌우지 않겠다는 돼지들의 선언이 있은 후라면, 살을 매개로 한 사람들과 돼지와의 착취관계는 더이상 성립할 수가 없는것 아니겠는가. 단지 삶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게 만들기가 여간 어려운것이 아니기에 그런 '천지개벽'이 이루어지지 않는것 일 뿐. 

그래서 살아남고자 하는 돼지들은 투자 대비 가장 효율적인, (사실은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우상 세우기에 열중한다.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 마음의 짐을 벗고자 몰아주기를 하는거다. 하지만 애초에 여럿의 몫을 한사람에게 몰아준 것이므로, 그 효과는 언제나 미미. 사실 돼지들에게 자신들이 살을 빼앗기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폭로보다도 더 껄끄럽고 무서울 폭로를 이 작품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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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이름모를 누군가가 써놓은 표현 그대로다. '현대판 벌거벗은 임금님'.
이 표현은 작게는 티에리 구에타와 그의 성공에 대한 비아냥일 수도 있지만, 조금더 크게는 현대 미술 (혹은 거리 미술) 판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 일수도, 우리가 옳다 그르다 라고 판단하는 정보들이 얼마나 작위적인가 하는- '이성'이라는 놈에 대한 고찰이 될 수도 있겠다.  


 이 이야기는 사람 좋아보이는 프랑스 출신의 미국인 '티에리 구에타'로 부터 시작 된다. 어머니의 임종과 관련한 트라우마로 인해, 현재를 영상으로 남기는데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 티에리는 찍는것을 위해 찍는 사나이다. 어떠한 목적이 있는것이 아니라 그저 현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필름을 소모해 가며 늘 카메라를 가지고 일상을 기록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사촌이 '스페이스 인베이더'라는 가명으로 거리 예술가로 활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병적으로 기록에 집착하는 티에리와 작품 활동 자체가 불법인 탓에 자신의 작품을 오랫동안 남기지 못하는 거리 예술가들과의 동조는 이렇게 시작된다. 티에리는 이전과는 다른 열의에 불타올라 기록을 하고,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포함한 예술가 무리들은 그들의 작품 활동 및 그 작품 자체를 영상으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 손해 볼것은 없는 일석이조의 상황. 

그렇게 만나는 예술가들의 폭을 점점 넓혀가던 티에리는 그 무리들 중에서도 가장 거물을 만나게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그 이름하여 '뱅크시'. 뭔가 들어본듯한 이름이기는 한데 쉽게 누군지 떠오르지는 않는다고? 바로 영국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아시아의 한 남자에게 영감을 준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요건...



 마치 과일 소주같은 이 이야기의 진행 상황에서 달콤한 과일향은 드디어 뱅크시의 작업까지 옆에서 기록하게 된 티에리가 애초에 기록을 남기는 이유로 밝힌 '거리 예술 다큐멘터리'를 완성해 내면서 그 수명을 다한다. 수 년동안의 두서없는 기록을 이어붙인것에 불과했던 작품의 완성도에 당황(?)한 뱅크시는 영화의 완성을 위해 자신이 직접 뛰어들게 되고, 영상을 찍어온 티에리에게는 가벼운 권유 비슷한 것을 하게 되니, 이제부터가 쓴 뒷맛+숙취의 시작이다.

'너도 남의 작품 활동을 찍기만 할게 아니라, 너만의 창작활동을 시도해 보는게 어때? 사람들 모아놓고 전시회 같은것도 해보고...' 

무려 뱅크시가, 그 이름도 유명한 자신의 영웅 뱅크시가 자신에게 예술가의 세계로 뛰어들도록 권유를 한거다. 이 때부터 티에리는 처음 영상기록을 남기는데 빠져들었던것과 같은 광적인 집중도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날때부터 왕후장상의 씨가 있는것도 아니고 거리로 나서 그리면 그가 바로 예술가 - 라는 식의 의미가 뱅크시의 '작품 활동'에 담긴 의미였다면, 티에리에게 있어서 '작품 활동'이란 이미 정상에 선 뱅크시가 시도하는 것과 같은 대형 이벤트였다. 무려 색칠한 코끼리가 등장하고, 그로인해 작품에 담긴 의미를 넘어선 각종 화제와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거다.


그런데 영화 필름을 잠깐 빨리 감기로 넘긴후 그 결과만을 본다면... 이것은 대반전. 미스터 브레인워시(티에리의 가명)는 예술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된다. 어떻게? 전시회 준비에 참여했던 스텦들은 두번다시 mbw (mister brain wash)의 전시회에는 참여하지 않겠노라며 이를 갈지만, 심지어 티에리 자신도 전시회 준비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는 너무 큰 일을 벌였다며 자신의 무모함에 좌절했지만, 그는 곧 'Madonna'의 25주년 기념 베스트 앨범의 커버 디자인을 담당하는 아티스트가 되기에 이르른다.

그런데 정말...어떻게???
구구 절절히 이 자리에 풀어놓기는 좀 그렇지만 대략 요약해 보자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시회라는 권위,
이미 인정받은 권위자의 인정을 통한 권위,
위의 두가지에 포섭된 언론의 소개라는 권위.

가 그 요인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의 '예술가 친구들'도 드러내놓고 mbw를 비난하지는 못하는데, 권력을 조롱하기 위해 시작했던 자신들의 작업이 이미 다른 권력이 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비판, 혹은 반성의 의미가 커 보인다. 단지 어깨너머로 구경이나 하던 사람이 대 스타가 되어가는 과정을 조롱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감독이기도 한 뱅크시가 장난처럼 시시덕 거리며 공중전화 부스를 이리자르고 저리 붙이고 하던 과정을 지나니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려나가는 것까지도 영화는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뱅크시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의 '권위' 역시나 위의 세가지의 요인들로 인해 성취된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 머릿속에서 잔잔하게 울린다.






#1. 제목 작명 센스가 ㄷㄷ. 역시 예술의 본질은 한줄기 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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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 1. <茂山>
청년 전승철(박정범)의 고향. 함경 북도, 무산. 지명 자체가 '우거진 산'일 정도로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곳이었으나 이러 저러한 이유들로 지금은 민둥산이 되었다고 한다.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고향을 떠나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넘어온 승철, 그리고 고향 친구 경철(진용욱). 그러나 탈북자, 혹은 새터민이라 불리는 이들에게는 목숨걸고 떠나온 고향에 비해 그다지 나을것도 없어 보이는 서울 하늘 아래서의 생활이다. 한가하게 문화적인 차이를 따질 겨를도 없이 당장에 벌어 먹고살 방법을 찾는데 죽을 힘을 쏟아야만 하는 처지이지만, 그나마 기회조차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그들의 몫으로 남는 것은 위험하고 돈이 안되는 일들 뿐. 이 '메마른 정글'에서 승철의 몫이 된 일은 (물론, 불법적으로) 전단지를 붙이고 현수막을 거는 일이지만 이 대단할 것 없는 일 조차도 목숨을 걸고 자기 몫을 지켜내려는 왈패들에게 시달리며 눈치를 보아야만 하는 처지다. 그나마 승철의 친구 경철은 이 사회에 더 적응을 잘한 축에 속하지만, 실상은 비슷한 처지의 탈북자들에게 사기를 쳐가며 더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뿐. 마치 기근에 종자로 쓸 씨앗을 먹어버리고는 농사지을 밑천이 없어진 '아둔한 농부'가 된 것처럼 결국 비슷한 처지의 자신의 동무들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써먹어 버린 경철은 언제 사실이 발각이 될까 전전긍긍하며 외롭게 피해다니는 처지가 된다. 


무산 2.  <無産>
 이런 승철이 누리는 단 하나의 '사치'가 있다면, 그건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는 일이다. 없는이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종교이기 때문이었을까, 예배후에 교회에서 주는 공짜밥이 그를 교회로 향하게 한걸까. 그런데 추측해 볼 이유들 중 한가지가 더 생겼다. 성가대의 숙영(강은진)을 짝사랑하게 된것이다. 차마 앞에 나서지도 못하며 존재도 드러내지 못한채 그저 근처에서 머물 뿐인 승철은 그녀가 일하는 노래방에 취직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마치 마리아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숙영이 운영하는 노래방은 팔지 말아야할 술을 팔고, 쓰지 말아야할 '도우미'들을 쓰는 퇴폐 노래방. '아픈 아버지 때문' 이라는 훌륭한 알리바이가 있지만 교회의 숙영과 노래방의 숙영을 연결시키고 싶어하지는 않는 그녀다. 그리고 승철이 노래방에서 일을하고 나서야 같은 교회에 다니게 됨을 알게된 숙영은 교회에서 서로 아는체 하지 말자는 말까지 꺼내게 된다. 마치 추레한 평소의 행색과는 다르게 친구 옷을 빌려서까지 옷을 갖춰입으며 교회에 나갔던 승철처럼 숙영에게도 교회라는건 일종의 '환상의 공간'. 거기서는 아픈 아버지 따위는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착하고 고결한 사람이 되어도 좋다. 그럴듯한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사람들과 그럴듯한 찬송가를 같이 부르면서 성취할 수 있는 자격이기 때문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이유로 불법을 저지르면서 살아야만하는 일상과는 엄연히 다른 공간이다. 교회라는 곳은.


무산 3.  <霧散>
 약삭빠른 친구 경철과 두 얼굴의 숙영을 겪어 내면서 승철 또한 이 사회에 점차 적응해 간다. 어리숙하게 겉돌던 이방인에서 점차로 이 사회에 대한 어색함을 벗어가는 승철. 자신을 위해 바지 한장을 훔쳐온 경철에게 역정을 내며 상점에 도로 갖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승철은 그 경철을 배신하고 돈을 가로챌 줄 아는 정도까지 다다랐고, 노래방에서 술을 파는 것이며 도우미 아가씨들이 자발적으로 희롱을 당하는 장면도 더이상 꺼려지지 않고 자연스럽다. 아마도 친구 경철의 목숨값이 되고 말 돈을 가로채 새옷을 사고, 이발을 하고, 새사람이 되어 노래방 알바라는 일상을 맞이하는 승철. 그리고 의도치 않은 커밍아웃으로 북에서 왔다는 것이 알려지며 숙영과의 오해아닌 오해도 풀리게 되어 이제 그녀와 함께 성가대 활동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루 하루가 갈수록 북에서 온 탈북자 전승철은 사라져 가고 서울 거리를 걷게 되면 두세 걸음마다 만날 수 있는 보통 도시인이 되어간다. 몇년이 지나면 북한 말투도 사라져 갈꺼고, 몇년이 더 지나면 능구렁이 사업가가 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전승철의 순수한 삶은 무산되어 간다.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내 처지가 아무리 곤궁해도 선뜻 욕심내지 않았던,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지언정 없는 감정을 꾸며 드러내지 못했던, 차라리 내가 곤란을 겪을 지언정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 몸부림쳤던 전승철의 순수한 삶은 무산되어 간다. 대한민국 사회에 익숙해져가는 과정이 곧, 전승철이라는 인물의 실체가 무산되어가는 과정인것. 















#1.극중의 주민번호 뒷자리의 125는 탈북민의 정착을 돕는 기관인 '하나원'이 위치한 지역에 부여되는 고유번호. 이전에는 모든 새터민은 하나원을 기점으로 주민번호를 부여 받았고, 중국에서는 이 번호를 가진 한국인에게는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고 함 (아마도 탈북자 문제에 대한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그런데 하나원 출신이 아닌 원래 남한 국적의 사람들까지 비자 발급에 어려움을 겪는등의 문제가 불거지자 새터민에게 부여되는 주민번호의 체계를 달리해서 주민번호만으로 탈북자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어짐.

#2. 극중 백구는 실제로 성남 모란시장에서 3만원의 개런티로 섭외한 犬이었다고. 촬영 후에는 감독의 강원도 고향집에 맞겼으나, 산짐승이 내려와 싸우다 유명을 달리하였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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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태(이제훈), 동윤(서준영), 희준(박정민)은 친구사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기태는 죽었고 희준은 전학을 갔으며 동윤은 기태의 장례식에 조차 오지 않았다. 그리고 기태의 아버지 (조성하)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고자 기태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여기서 이 영화는 그저 말 한두마디로 쉽게 기태의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듯이 세 소년이 서스럼없이 친했던 순간과 우정이 깨져 파국에 이르렀던 순간들을 두서없이 드나들며 미스테리의 끈을 놓치 않는다.




이 영화는 고등 학생 세 소년의 이야기다. 역할을 맡은 실제 배우들의 나이는 모두 성인이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고등학생의 외연에 어떤 이음새가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만큼 극 속에서 이들이 사용하는 어휘나 행동들은 딱 그 또래의 그것이며, 성인의 시선에서 재구성한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썩 괜찮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이 극은 누가 봐도 고등학생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극은 세 소년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여타의 고등학생 시절을 다루는 영화에서 다룰법한 요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성적 문제, 학교나 가정의 억압 등등. 그런면에서 보자면 또 이 영화는 전형적인 청춘 성장영화의 구분에서는 두 발짝 정도 벗어나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성장 영화에 방점을 찍지 않는 다면 이 영화의 메세지를 구분하는 범주는? 아마 '오해가 이루어지는 과정' 쯤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극중에 친구들끼리 쉬는 시간에 모여앉아 얘기를 나누는 중에 '요즘 중학생'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사실 지어냈을 정황이 큰 이야기 였지만 대충의 내용은 '요즘 중학생들 무섭더라...여자애들까지 끼고 담배를...한번 쳐다봤더니 막 덤비는데...그 수가 일곱명정도는 되어서...' 였다.  사실 자신들도 대외적으로 담배며, 여자 친구며, 무분별한 폭력이 허용된 존재들이 아님에도 그런 규율을 어기고 살고 있는 이 '고등학생 형들'은 중학생들은 아직 담배며 여자 친구며 폭력성을 감히 드러내서는 안되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한 때의 치기, 혹은 아주 정상적이고 때로 긍정적이라고 까지 할만한 성장통,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고통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어른들'이 열 일고여덟의 방황을 제 멋대로 아주 낭만적인 이미지로 덧씌워 버리듯이. 자신도 제 앞가림을 다 못하고 살면서도 열일곱의 '아이들'의 고민에서 해탈한 양 설교를 늘어놓을 사람들이라도 한눈에 알아 챌 수 있는 원초적인 비극의 씨앗이, 그러나 이들, 아이들 사이에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둘도 없이 친했던 친구들이 어떻게 서로 때리고 맞고 상대를 죽게까지 만들었는지 그 여정을 따라가 본다면 그 과정의 어이없음에 실소가 나올 지경. 그러나 마냥 그들을 비웃어 버릴 수 없다면 그것은 과거 자신의 모습이, 혹여 지금도 이 소년들 처럼 사람 사이에서 괴로워 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기 때문이리라. 
 

주목 받고 떠받들여지고 싶으면서도, 같이 가고 싶은 욕망.
그 팽팽한 자기장 사이에서 흔들리는 바늘.


  왜 일이 이렇게 된건지,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에 대한 해답은 그 말을 꺼내는 기태 스스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알면서도 그렇게 끌려갈 수 밖에 없었던 불가항력에 의한 괴로움을 그런식으로 표현 했을 뿐.








#1. 왜 제목이 '파수꾼'인가는 별도의 소개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은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생각이 오해를 낳게 되었고 그 결과로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2 '친구사이?'에 기태역의 이제훈이 나왔었다니. 이제 짜맞춰보니 기억이 나는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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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느와르. 

이 영화에 대한 평은 포기.

지금 상황에서 내가 쓸수 있는 글의 수준의 한계는 여기에도 미치지 못함;;;

단지  198분의 런닝타임 못지 않게 길었던 '관객과의 대화'라는 경험이 유쾌하게 남았음.

그러나 영화 직후에 감독과 출연배우를 아주 가까운 물리적인 거리앞에서 바라보고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경험이 아

니라면 과연 얼마나 유쾌한 경험으로 이 영화를 기억했을지는 모르겠음;;




영화를 보고 나서 평들을 쭉 훑어보니 '이 사람은 영화 평론 자료로 자신의 영화를 활용하려고 영화를 만든거 같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음. 

그럼 뭐 어때.

누구는 벗은 몸 보러 영화를 보고, 누구는 폭력욕의 대리 만족을 위해 영화를 보고, 모든 제작자들은 자신의 생업(?)으

로 영화를 대하는거지만 그 중 별나먹은 평론가는 자기 수업 자료를 위해 영화를 만들었대도 별 수 없는거지 뭐. 

자신의 정력과 재능을 쏟아 부었고, 그 결과물이 박물관의 먼지 쌓인 자료 처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자기 명줄 줄어들

걱정까지 '지불'한 사람이라면 이런 수업 자료를 만들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함.  








#1. 갈피를 잘 못잡겠는 감상과는 다르게 이 영화를 보고나서 얻은 확실한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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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실 생각보다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던 정성일 감독.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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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젊은 한때의 치기에 가까웠던 의대생 에르네스토의 남미 종단 여행이 혁명가 '체'를 낳는 과정이 되었듯이,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정호현의 쿠바 탐구는 애초의 의도와는 다른 전혀 의외의 결과물을 낳게 된다. 바로 연인 '오리엘비스'를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뜬금없는 인생의 변주를 가감없이 그대로 들려준다. 




영화 전체를 놓고 보면 그래서 어느 주제를 특정하여 거론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른다. 초반에는 밖에서 보는 쿠바의 이미지를 한꺼풀 두꺼풀 벗겨내는 쿠바의 민낯 탐구가 주 목적이라면, 중반 이후부터는 여느 연인의 연애사와 다르지 않은 부대낌이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내용이 주가 되어 보여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혁명가 체 게바라와 그의 남미 종단 여행을 괴리 시켜 생각하지 않듯이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 격인 정호현은 쿠바와 자신의 연인 오리엘비스를 괴리시켜 파악하지 않는다. 애초에 기획했던 화면안에 비집고 들어온 오리엘비스를 애써 잘라내지 않음과 동시에 연인을 만나기 전까지의 (쿠바의 민낯을 탐구했던) 과정도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결국 오리엘비스는 쿠바라는 체제안에서 살아왔고, 그 오리엘비스를 통해 쿠바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니 일견 동떨어져 보이는 두 소재는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쿠바와 오리엘비스에게만 방점을 찍지는 않는다.'국민은 일을 하는척 하고 나라는 돈을 주는 척 한다'는 말로 요약되는 쿠바의 민낯을 뒤로 하고 오리엘비스, 호현 커플이 맞딱뜨린 대한민국. 허울 좋은 평등 속의 극심한 저효율, 억압, 독재가 쿠바인을 속박하는 요소라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또 다른 요소로 속박을 당하고 있다. 끝간데를 모르는 고효율로 오히려 내팽개쳐진 노동자들, 패싸움 편먹듯이 '전도질'을 하는 종교 문화, 다른 외양에 대한 천박하다거나 오지랖 넓다 할만한 관심과 배척들... 남의 시선으로 상처받을 딸이 걱정이 되었는지 그 스스로가 확고한 의지를 가져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는 나이 꽉찬 딸에게 흑인만 아니면 되지 누구와 만나도 아무 거리낄것이 없다고 했다는 호현의 어머니. 그런데 그런 상처에 대해서는 나이든 노인에게서 뿐만이 아니라 거리낌없이 오리엘비스와 어울리는 조카뻘 아이들의 입에서도 나오는 정도다.    

쿠바에서 '이 아름다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 밖에 없구나' 하며 탄식을 내뱉었다는 정호현 감독. 그녀는 '그래도 그들에게는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흥이 있고 희망이 있다'는 식으로 애써 포장하지는 않는다. 현실이란 그 보다는 진지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 다큐멘터리 영화도 결국 어찌보면 궁상맞게도 어찌보면 흥겹게도 보이는 음악과 춤과 함께 오리엘비스,호현 커플의 2세 잉태 소식과 함께 끝이 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모든 어려움을 이 춤으로, 이 음악으로, 사랑의 결과물인 이 아이로 말미암아 이겨 낼 수 있으리라고 섯불리 앞장서지는 않는다. 단지 거기에 쿠바가 있었고, 거기에 오리엘비스가 살았고, 사랑에 빠졌고, 아이가 생겼고, 항상 음악과 노래가 함께 할 뿐이다. 

영화는 마치 근방 옆 나라에서 시작 되었다는 레게 음악을 '보는 듯' 하다 (쿠바하면 체 게바라를 떠올리듯 레게 하면 밥 말리를 떠올리게 되고, 사실 내가 아는 레게는 거의가 밥 말리의 음악이기는 하다;;). 처음 레게를 접하게 된다면 특유의 멜로디와 리듬으로 인해 마냥 노세 노세 하는 노래로 취급하는 경우가 생기기 쉽다. 물론 많은 노세 노세 하는 노래와 사랑 노래가 있지만 유명한 곡들 중에는 여느 노래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선동적이거나 정치적인 메세지를 담은 노래도 많다. 그러나 그런 노래라 하더라도 레게 특유의 멜로디와 리듬감을 놓치지는 않는다. 이 영화 역시도 재기 발랄한 리듬감을 놓치지도 않음과 동시에 쿠바와 한국,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랑을 만들어가는 연인의 모습을 별 거부감 없이 넘나든다. 너무 무게잡고 진지하지도 않으면서 생각없이 풀풀 흩날리지도 않는 이 영화, 참 '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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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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