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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소송사건(Bananas!*)'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다국적 과일회사 '돌(Dole)'이 독성 농약을 사용하여 농장 노동자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을 다룬 내용이다. 일단, 난 이 작품은 보지 못했다. 내가 봤던것은 ebs였는지 kbs였는지에서 다큐멘터리 축제를 하면서 편성했던 '바나나 소송사건 그 이후(Big Boys Gone Bananas!*)'였는데 이게 참 걸작이었다. 걸작이라는 표현은 작품 자체로서도 흡인력있게 잘 만들었다고 평가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반어적인 표현으로 '참 하는 짓들이 걸~작이다~'의 의미이기도 하다. 별생각없이 만만하게 마트에서 고르던 바나나의 그 귀여운 스티커를 이다지도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붙이고 있었다니... 이 거대 기업은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낸 '바나나 소송사건'이라는 다큐영화를 이세상에서 '박멸'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해외 영화제에 이 작품을 내리도록 압력을 가하는가 하면 각국의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해 영화가 상영되는것을 막기도 한다. 물론 그 와중에 각종 소송이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것은 기본이고. 그리고 그 결과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거실 소파에 누워있던 나에게 까지 전해지질 않았는가. 거대 회사는 참패하였고, '힘없는' 소규모 다큐제작자는 이겼다. 이 '작은'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여드름을 짜내려다 자신의 손이 그 상처를 덧내는걸 인식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지. 사람들은 그저 먼나라의 농장 노동자들이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보다, 그 거대기업이 정치인과 언론을 동원하여 자신들을 핍박하고 억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자 그저 공분의 의미를 넘어서 공포로 무장하게 되었던거다. 마트에서 만만하게 바나나를 골랐던 사람들에게 두 다큐의 의미는 같지 않았다. 기업의 행태는 같았을 지언정.


본작의 이야기를 해보자. 사람들은 이 다큐의 내용을 접하기 보다 이 다큐가 세상에 나오자 이 세상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를 먼저 보고 있다.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제기되고, 기각되고, 멀티플렉스 체인점에서 조그맣게 상영이 되었다가, 돌연 취소되었다. 긍정적 현상인지 부정적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영화 이상의 의미를 벌써부터 갖게 되었다. 내용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는 외려 뒷전으로 밀려난 채로. 이제껏 보아왔던 많은 한국사회의 논쟁거리가 그래왔듯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알맹이에 대한 판단은 사라진채로 유치하지만 살벌한 힘겨루기와 소득없는 감정싸움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이래선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지만 어느 한쪽도 뭘 얻지는 못하는 소모전이 되고 말 뿐인것을. 정작 중요한 알맹이를 놓고 본다면 이게 그렇게나 흥분해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를 대하듯 할 내용은 아니란걸 알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래, 이 글에서도 이제서야 이 영화에 대해서 좀 설명할 수 있을것 같다. 가장 먼저 든 기분은 어렵지 않다는거였다. 사실 개인적으론 천안함 사건 당시엔 온갖 정보의 홍수속에서 어떤 정보를 취합해서 판단에 활용할 것인지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 그 정보들은 하나같이 물리학등의 각종 과학적인 사전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들이었고, 그래서 대체로 전문가들의 의견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사람 말이 다르고 저 사람말이 다르니 애초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로는 천안함의 조사 결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어떤 확신을 갖고 있기보다는 종교적인 믿음에 가깝게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다루는, 정말로 폭발이 있었다면 그 엄청난 열이 왜 사고 직후의 열 화상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는가와 같은 그저 간단한 논리적인 차원에서의 의문에는 어떤 과학적 사전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심지어 이해를 돕기 위해 비슷한 열로 쇠를 달구고 대형 수조의 물에 담근 후 얼마동안 그 주변의 물이 달궈진 쇠와 비슷한 정도의 온도를 띄는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건 뭐 빨간펜 첨삭지도 수준이다. 거기다 처참하게 두동강난 배가 곧바로 폭발의 증거가 되는것은 아니라는, 다른 과정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을 개연성을 풀어내는 부분에서는 일찌감치 수학포기 문과생이었던 나로서는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그 복잡한 내용이 이해가 다 되게하는 기적을 행해 보였으니.


물론 쉽다는 말은 그만큼 첨예한 부분을 많이 비켜갔다는 말일 수도 있을 테다. 실제로 천안함에 대해서 많이 들고 팠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다루지 못한 많은 쟁점들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들도 이 영화를 우선 영화로 본것이 아니라 천안함이라는 쟁점에 대해 유리한 입장에 서게 해줄 동료 정도로 판단한 측면이 크지 않을까? 영화가 한정된 시간안에 다루기엔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의 논란이 있다. 아마 그걸 다 다루면서, 이 영화 한편으로 모든 논란을 끝내리라 생각했다면 아마도 영화는 실패한 졸작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대신에 역설적으로 이렇게 '밍숭맹숭'하게 만든 영화가 온갖 영화외적인 풍파를 겪으면서 절절히 보여주는 생생한 현실이 있질 않는가. '아니... 이 정도도 안된다고?'


아마 내가 한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외국인이었다고 친다면, 이 작품을 마음놓고 흥미로워 했을 것 같다. 촌스럽게 감독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지도 않았으면서, 복잡한 사안에 대한 탐구의 과정이 어렵지 않게 펼쳐져 보였다. 거기다 영화 내에서 부터 이미 감지 되고 있었던 '자기 검열에 대한 요구'가 스크린 밖의 세상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생생하게 느껴지질 않는가. 마치 제 3세계의 농장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 및 착취가 선진국 영화제작제에게 어떤 모습으로 재현되는 지를 내가 흥미롭게 지켜봤던 것처럼, 천안함 이라는 단어로 취합되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곳이 나의 터전이 아니었다면 난 또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을. 이 흥미로운 작품을 앞에 두고 일단 비분강개하고 분노의 게이지를 한껏 올려놓아야하니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나. 이건 천안함이 폭침이냐 좌초냐의 진실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다. 천안함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는것이 아니라, 이정도의 가벼운 의심에도 전방위적인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천안함 사건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와중에 나의 가장 큰 염려는 이거다. 이긴다는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스웨덴의 '프레데릭 예르텐'이 이겼던 것처럼 한국의 '백승우'도 이길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천안함 프로젝트, 그 이후'가 나올 수 있을까? 이 암울한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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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아마도 곧 재개발이 이루어 질듯한,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유령같은 마을을 헤매는 여자가 있다. 이 여자의 목표는 그 텅빈 마을에 남은 유기견들. 유기견들을 데려다 씻기고 치료해주고 새로운 입양처를 알선해주는, 무던히도 부지런하고 착한 그녀의 이름은 '혜화(유다인)'다. 동물 병원의 미용사로 일하는, 그닥 여유롭지도 못한 처지에 병들고 다쳐 새로이 선택받지 못하는 개들은 다 자신이 데려다가 키우는 그녀. 산동네의 허름한 그녀의 집은 마음씨 좋은 동물 애호가의 그것과, 병적인 집착으로 키울 여력도 안되는데 개들을 '수집'하는 이상 증세를 가진 사람의 생활 환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한편, 혜화가 일하는 동물 병원의 원장 및 그의 아들과는 흡사 가족과도 같아 보이는 묘한 관계로 맺어져 있다. 때로 혜화가 원장의 어린 아들의 밥을 챙겨 먹이기도하고, 원장은 별 거리낌 없이 차키를 맡기고 차를 쓰도록 하기도 한다. 때이른 성에 대한 관심인지 일찍 어머니를 잃고 혜화를 제 어머니인양 따랐던 아이의 모성 결핍인지모를 원장 아들의 젖가슴 집착에 짐짓 어르기도 하지만, 잠든 아이의 손을 슬며시 가슴팍 안으로 품곤 하는 혜화. 
 
 스물셋의 혜화에게서 드러나는 감정은 모두 조금은 넘쳐 보인다. 길잃은 개들을 돌보는 마음가짐이며 행동도, 원장의 아들에게 품는 모성의 감정도 사실은, 과잉이다. 자신의 물리적인 환경과는 일정정도 괴리된채로 마음이나 혹 감정이라 해도 좋을 어떤것이 그녀를 다그쳐 이끌어 간다. 이런 지금의 혜화를 다그쳐 끌고 나가는 그 무엇은 그러나 사실은 지극히 물리적인 '상실'로 인한 결과다. 5년전, 그녀나이 열여덟의 상실. 





 열여덟살의 '아이'가 아이를 가진 상황이라면 적어도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낙태가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여 질 테다. 그나마 아이이자 어머니가 뱃속의 생명을 포기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곧바로 입양을 보내게 되는 것이고. 그러나 사람들이 '합리적인' 기준으로 인해 무언가를 포기하는 경우는 비단 미성년 여성이 임신을 했을 때 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선택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는데 대부분 그렇게 포기 되는 것들이 '생명'이라는 것.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아주 '합리적'으로 포기되는 10대 시절의 삶, 성취인지 생존인지 모를 돈벌이를 잘하기 위해서 '합리적'으로 절제 되는 스스로의 건강 혹은 가족이나 친구 따위의 관계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아주 '합리적'으로 재구성 되는 가축들의 사육 환경등등. 

 사람들이 선택의 과정에서 유달리 '생명'에게 박한 이유는 아마 가장 만만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일테다. 더 그럴듯한 비유를 해보자면 만기가 한참이나 많이 남아서 갚지 않아도 될 정도로 느껴지는 빚 정도 랄까? 쉽게 실감되지 않는거다. 당장에 그럴 듯 한 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어날 일들은 눈앞에 잡힐 듯이 보이지만, 청소년 시절의 감정과 감성을 방치하다 시피 무시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지는 체계화 시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그러나 쉽게 무시하고 지나갔던 작은 균열은 시간과 함께 성장해 거대한 파열음을 내며 삶을 송두리채 동강내 버리곤 한다. 그리고'생명'을 저당잡힌 채로 누렸던 찰나의 단물을 다 빨아먹은 뒤로 이와같은 파열을 접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그제 서야 후회를 한다. 원했던것은 이게 아니었다고. 하지만 결국 선택했던것은 자신인 것을...

그래서 인가. 조금 답답하기도 하다. 도저히 선택하지 못 할 것을 선택하라고 하는 충고라니. 
내 맨 가슴팍에 품기에는, 너무 따뜻한 영화다. 나는 아직 나중에 후회를 몰아서 하려는 사람인가 보다.






#1. 주워 듣기로, 운동 선수가 어떤 부위에 부상을 당하게 되면 다른 부위에도 부상이 생길 위험이 높아 진단다. 예를 들어 투수가 팔꿈치에 부상이 생겼다고 치면, 투구의 과정에서 팔꿈치가 담당해야 하는 부담을 팔꿈치가 온전히 담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부위의 부담이 더 늘어나게 된다. 그렇게 어깨에, 허리에, 허벅지에, 무릎등에 더해지는 한계치 이상의 부담은 쉽게 그 부위를 다치게 만든다. 참 오묘하면서도, 당연한 신비.

#2. 쳇, 그런 후진 기어 따위 실제 인생에 있을리 없잖아. ㅠㅠ





<위의 사진들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 비밀의 화원, (주) 인디스토리 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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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이름만 얼핏 들어 본 듯한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기회가 있기에 선택을 했지만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인터넷 검색 결과에 무시무시한 영화평들이 난무하기에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기분은 생각보다 유쾌. 뭐 미리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기는 하다.




1.
검색을 해 보니 '론 맨(고독한 남자?)'로 소개가 되고 있는 주인공 (이삭 드 번콜). 아마도 엄청난 임무를 가지고 스페인에 도착한 듯한 사내다.  그리고 마치 점조직 처럼 흩어져 있다가 서로를 찾아갈 단서를 그에게 전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일련의 정보들을 바탕으로 최종 미션에 도달, 결국 목표를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 그런데 문제는 관객의 입장에서 그 단서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챌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 심지어는 그 알쏭 달쏭한 정보들이 단서이기는 한 것인지 조차 확실하지가 않다.

기타,블론드,누드,물러큘러스,멕시칸,운전사 등의 인물이 주인공과 만나 정보를 교환하는 에피소드들은 일련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1.혼자서 두개의 컵에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
2. 위의 인물들이 주인공을 찾아와 앉은 후, 각자 관심있는 화제거리(악기,영화,슈베르트,다이아몬드,분자 등)에 대한 질문을 한다.
3. 주인공이 별 말없이 복서 그림이 그려진 성냥갑을 내밀면 같은 디자인의 색깔이 다른 성냥갑을 내놓는 인물들.
4. 그리고 새로 받은 성냥갑 안에는 암호와 같은 글자들이 작은 쪽지에 적혀있고, 그 쪽지 내용을 확인한 주인공은 한 모금의 커피와 함께 그 쪽지를 삼켜 버린다.
5.선문답과도 같은 인물들과의 대화 이후에 주인공은 미술관으로 향하고, 아마도 대화중의 힌트(혹은 쪽지에 적힌 정보)로 찾아 갔음직한 그림에서 또 다른 힌트를 얻어 다음 정보에 접근하게 되는 주인공.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첨가 하자면,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처음에는 스페인어로 주인공에게 접근 하지만, '스페인어 할 줄 모르죠?'라는 처음의 질문 이후에는 알아서 영어로 대화를 계속해 간다. 



2.
이런 에피소드들로 영화가 중반부에 까지 다다르자 나는 마치 영화 상영 중간에서야 극장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영화 초반부에 저런 알쏭 달쏭한 정보들에 대한 힌트가 모두 설명이 되는데 그 중요한 장면을 보지 못한 관계로 영화의 내용을 전혀 알아먹지 못하게 된 처지가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일정한 공통점을 지닌 저 행동들이 어떤 정보에 접근하기 위한 힌트가 되는것 같다고 내가 느끼는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주인공은 이삭 드 번콜의 연기와 효과적으로 사용된 배경 음악.


 때때로 기 체조(?)를 통해 수도자와도 같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에, 적당히 예절바른 듯 하지만 까칠함을 굳이 숨기지는 않는 모습에, 단호한 듯한 무념 무상의 눈빛과 오다리의 팔자로 걷는 걸음 하나 하나 마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어찌보면 논픽션 다큐멘터리의 장면같기도 한 주인공의 모습. 
 
그리고 어떤 인물이 등장한다거나 어떤 사물앞에 섰을 때 쓰이는 배경 음악들은 주인공의 눈앞에 놓인 정보들이 중요한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내 보인다. 물론 이는 장르 영화에서 쓰이는 관습에 익숙해진 결과로 나타나는 반응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지루하게까지 보이는 주인공의 묵묵한 일상의 한가운데 그 진행이 적지않게 극적인 음악이 쓰인다면 그걸 보는 (어떤;;) 관객의 입장에서는 '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지루한 일상과는 다른 무언가 의미를 지닌 사건이구나'하는 짐작을 하게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음악은 충분히 그걸 가능하게 할만 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쓰인 음악을 가져오기 위해 퍼온 예고편. 예고편만 보고 극장 간사람들은 화좀 나겠네.ㅎ>



3.
이렇게 따지고 본다면 주인공의 행동에 개연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객이 그 개연성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주인공의 연기가, 어떤 특정한 대목에서의 음악의 사용이 그 개연성을 설명해 주고 있질 않나. 그리고 결국은 그 여정의 결과로 목표에 도달 했으니 그 과정의 정합성은 쓸만했다는 소리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연중에 관객이 개연성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와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른 사실을 똑같이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가상의 현실, 간접의 경험일 뿐인 영화의 본질 보다도 그 영화를 통해 경험할 한 두시간여의 판타지에 도움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고려의 결과로 영화가 가진 상품, 혹은 인공물로서의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것 처럼 취급되기 일쑤다. 마치 포장만 뜯으면 바로 먹을 수 있는 빵을 대하듯, 두 시간여의 시간과 영화 티켓값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어떤 메세지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책임을 모두 영화에 맡겨버리고 영화가 설명하는 정보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수 많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는 그 메세지가 불특정 다수에게 비교적 온전하게 전달 되도록 비약,함축,생략,과장등을 사용하므로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들만으로는 결코 그 본질에 가깝게 갈 수 없음에도 두어 시간의 투자와 영화 티켓 값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영화에게 본질에 가깝게 내려다 놓을 것을 요구한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화가 부실했기 때문이며 거기에는 관객 그 자신의 책임은 전혀 없고 단지 영화를 잘못고른 안목의 자책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그 본질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것에 대한 경계도 허술하기 이를데 없이 그저 영화에서 말해주는 정도의 정합성을 증거로 해서 영화가 말해주는 것이 본질의 전부인양 받아들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게 내가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온전히 본질에 도달하려는 영화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도 서슴없이 나올 수 있는 거다. 사회가 잘못돌아가고 있는건 다 정치인이나 부자들 때문이라는 대포집의 책임전가 토크와 비슷한 맥락이랄까. 나는 죄안짓고 착하게 살고있다는 것으로 할 몫을 했고, 더 힘이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할 몫이 있으며 그 특별한 몫을 안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이 사회가 이모양 이꼴이 되고 있다는 의미. 거기에 '나'는 이미 내 몫을 했다는 구실로 빠져나갔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힘을 쏟지 않느냐가 빠져있으니 왜 나의 환경이 이런 지경인지 파악하는 데는 항상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분풀이만 있을 뿐 진짜 이유는 도저히 알아 낼 수가 없다. 그리고 현상에 대해서 이렇게 파악하는 것이 그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limit'가 되는 것이고,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본질에는 다가갈 수 없다. 마치 극 영화를 접하는 관객은 영화의 메세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영화에서 제공하는 정보 이상의 어떠한 생각을 더 쓰지 않아도 된다는, 스스로가 설정한 한계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이런 메세지들은 영화의 엔딩과 함께 올라가는, 영화의 제목을 변형시킨 다음과 같은 문장에 드러나 있다.  

'no limit no control'








#1.내가 어떻게 이 영화를 보고 이런 결론에 도달 했느냐고? 그저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했을 뿐이다.
#2.성냥갑이며 쪽지며 미술관은 다 잊어버려라. 내 생각일 뿐이지만 저것들은 그저 장치를 위한 장치일 뿐, 파고 들면 짜증만 난다.ㅎ
 



<위의 사진들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 ㈜스폰지이엔티 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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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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