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072017  이전 다음

  •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  

''화이목'은 가상의 식물'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10.11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 - '크면 다 알게 된단다'의 생생한 해석- (1)





이름 조차도 특이한 '화이 (여진구)'는 특이하게도 아버지가 다섯이다. 그 면면은 그러나 한 대상을 다섯으로 쪼개놓은듯 단선적이다. 그리고 화이는 그 다섯 각자를 모두 아버지라 부르며 지내고 있다. 각자 형제로 칭하는 그들에게도 '형수'가 있는데 그 여인은 이 다섯 사이에서 사슬에 발목이 묶인채로 지내고 있으며 화이는 이 여인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지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들 다섯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는 여인이 혈연관계가 아님을 알고 있으며, 애초에 그렇게 지내 왔기에 별다른 저항을 겪지 않고 서로 그 관계를 인정하고 살고 있을 뿐이다. 수 많은 억압속에서 지내온 '어머니' 역시나 이제 발목을 감싸던 족쇄가 풀렸음에도 두목격인 석태(김윤석)를 남편으로, 먼 옛날 '아버지들'이 유괴해온 화이를 아들로 여기며 살고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감독인 장준환이 밝힌 바를 보자면, 돈을 받고 살인을 저지르는 석태 무리가 분재를 다루는 화원을 위장 운영하고 있다는 점은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멀쩡히 두어도 잘 자랄 식물을 인공적으로 힘을 가해 기형적인 모양으로 뒤틀리게 해 놓고 그 아름다움을 논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들은, 특히 석태는 나무를 이리저리 뒤틀어 '아름다운' 분재로 만들듯이 화이도 그렇게 아름다운 분재로 만들려고 한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자신들이 이 세상을 지내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살인 기술들을 대신에 가르친다. 정작 화이는 그림에 흥미를 가지는 여린 아이이지만 석태에게 화이의 여린 감성은 그저 쓸모없는 감상일 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화이는 자신만큼의 괴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괴물이 보인다며 두려워 하는 화이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우화와도 비슷한 이야기는 그러나 현실적인 질감을 잊지 않는 영리함을 역시 갖고 있다. 화이의 '가족'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 비현실적인 설정이 종종 잊혀질 정도로 이들의 액션 및 그 계획은 현실적이다. 마치 고대의 신화와도 비슷한 구도의 인물들이 액션마저 마법이나 경공술을 쓰는것이 아니라, 피가 뚝뚝 흐르는 고어 장르에 가깝게 구현해 보이니 이 기묘한 엇박자는 독특한 개성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지나치게 어둡다거나 잔인하다는 평을 한다. 여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종의 '하이틴 액션물'로서 관객에게 다가서기엔 많은 관객들이 당황스럽게 생각 할 수도 있다는 말인건데, 오히려 이 엇박자가 이 영화가 말하려는 핵심이 아닐까 싶다.


부모 세대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부조리마저 '세상'이라며,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알아야 한다며 자신들의 틀에 가두려하는 폭력은 신화가 신화이기 이전의 시절 부터 이어져온 반복이다. 이를 역사라하기엔 지금까지도 유효한 현상이니 차라리 그저 반복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듯 하다. '제우스'가 애저녁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 살아남은 신화가 되는 동안 부모의 이 '폭력'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남은 신화이니, 오랜 역사를 지닌 신화인 동시에 지극히도 현실의 일인 것이다. '크면 다 알게 된단다'라며 당장의 곤혹스러운 질문에 유예기간을 두는 '그 들'이지만 과연 커서 다 알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클 때까지 둔 유예기간 동안 자신과 같은 부조리를 가진 존재로 다듬어 내게 되는 것일까? 크면 다 알게 된단다라는 포장으로도 쉽게 마감처리 되지 않는 의문은 곧바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여져 본능에 가까운 분노로 표출 되곤 하는데,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앎이 과연 앎이냐 하는거다. 그건 오히려 '이렇게 알지 않고서는 넌 사람이 아니다, 혹은 다 큰게 아니다' 라는 협박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나 '부모'가 되고 나면 자식 앞에 드러난 자신의 부조리가 '세상'이 되지 않고서는 자신이 살아야 하는 근거가 없어지게 되므로, 크면 알게 된다며 벌어놓은 시간동안 자신의 세상에 알맞은 분재가 되도록 아이의 가지에 철사를 감게 되는거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비로소 한 아이의 부모는 자신의 부모에게 '이제 세상을 알겠어요'라는 고백을 하게 되면서 '크면 다 알게 된단다'라는 부모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 실현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불편하다고 하는 이면에는 잔인하게 피가 튀는 장면보다도 이런 문제제기를 하고 있기에 그런것이 아닐까? 모두가 아무런 의심없이 아이의 팔에 철사를 감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이의 팔에 철사를 감는 대신 왜 내 팔을 어그러뜨렸느냐는 항의를 내 부모에게 하지도 못하는, 마음속 깊은 곳의 원죄와 비슷한 그 무엇을 건드렸기에. 








#1. 요즘들어 여기나 저기나 개성이 있네 없네로 말들이 많지만 

     그야말로 개성이 존재의 이유가 될 만한 수작을 만나게 된 것 같다. 

    앞으로도 쭉 지구를 부탁합니다, 장감독님.


#2. 화이는 과연 괴물이 된걸까?

     괴물을 삼켜 버렸다는건 그걸 초월했다고 보는 건가?










<위의 사진, 동영상은 모두 단순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권리는원작자에게 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어린쥐™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