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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창조'적인 '융합'이 대세인 시대이지만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것만 같은 조합이 있다. 이를테면 게임 셧다운제와 문화 컨텐츠 산업 진흥이랄지, 어둡고 지저분한 창고같은 방에 콕 틀어박혀 일을 하는 이른바 '포토 에디터'와 몸 다치는것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훌륭한 사진을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사진 작가라던지, 아니면 이 만큼이나 다른 자장을 가진 벤 스틸러와 숀 펜이라는 두 배우의 하모니 같은것 말이다. 어떻게 벤 스틸러와 숀 펜이 같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는지 그 모습이 우선은 궁금했다. 주로 코미디 영화에 나오며 그 입지를 다져왔던 벤 스틸러와 이른바 작가주의적인 영화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온 숀 펜은 그러나 이 영화에서 딱히 그들의 노선을 벗어나는 연기를 보여주는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둘은 딱 벤 스틸러같은 월터 미티와 딱 숀 펜같은 숀 오코넬을 연기하며 다른 둘의 세상이 부닥치는 순간을 멋지게 표현해 냈다. 이 영화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LIFE)'의 목적이다.


이 짧은 글귀는 'LIFE'지가 '그 들(LIFE)'을 정의 내린 내용인데, 아무런 해본 것도 가본곳도 없는 집오리 같았던 월터가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서 세상을 누비는 철새같은 숀의 세상으로 다가가 더 넒은 세상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현실의 도전을 대신해 월터를 흥분 시키는것은 그의 지나치게 풍부한 상상력인데, 그렇게 공상에 빠져 들 수록 현실의 삶은 더욱더 위축이 될 뿐이다. 그러다 회사에서 짤리게 될 위험에 닥쳐서야 등에 떠밀려 숀의 인생의 정수를 담은 사진 한장을 얻기위해 이름도 생소한 그린란드로 떠나게 된거다. 그리고 월터는 누군가의 공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을 현실로 겪어내며 점점 더 숀의 세상에 가까워져 간다.


영화 내내 월터의 인생이 가치를 띄게 되는건 숀 오코넬이라는 대단한 사람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순간 뿐인데, 그의 '취향'에 가장 잘 들어맞는 작업 결과를 보여주는 사람이 월터 뿐이라는 평가가 내려지자 그저 어둑한 장소에 처박힌 너드에서 주관있는 장인과도 같이 보이는 화학작용을 봐도 그렇다. 점차로 월터의 인생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수 많은 '윙크'로 짐작 할 수 있는) 남들의 시선에 의해서도 긍정적이 되어가는건 그의 인생이 숀의 궤적과 닮아가는 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예민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래서 이 영화를 유럽여행 욕구를 뽐뿌질하는 최근의 대x항공 광고와 같은 선상에서 놓고 볼지도 모를 일이다. 소심하게 틀에 박힌 일상을 보내던 사람이 과감하게 시도하고 도전하며 온갖곳을 돌아다는 모습이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으니. 


그러나 영화는 조금은 의외의 지점을 목적지로 삼고 있다. 월터의 '집오리'로서의 모험이 이미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었음을, 그 집오리의 모험이 철새를 날게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월터 스스로만이 철새의 모험을 꿈꾸며 공상에 빠져 있었을 뿐, 그는 이미 소중한 동료들을 가진 훌륭한 모험가였다. 집오리의 세계에도 넘어서야 할 무수한 장애물과 벽이 있었고, 알아가고 느껴야 할 서로가 있었다. 집오리 월터는 루저도 너드도 아니었다. 단지 그 장애물과 벽앞에 주저주저하고 그저 다른 세상에 대해서만 꿈꾸었던 공상가 월터가 루저고 너드였을 뿐. 결국은 철새를 따라간 모험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월터지만 이제 그는 더이상 먼 하늘의 철새의 날갯짓만을 보고 한 숨짓는 대신 집오리로서의 모험을 두려움없이 해 나가게 될 테다. 이 영화를 보았을 많은 집 오리들이 그럴 것 처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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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괴작 시리즈의 정체는 뭐지? 1편에 대해서는 '새벽의 저주'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평을 했었던것 같다. 2세대 장르영화의 탄생과도 같은. 그런데 이 속편에 이르러서는 거기에서도 좀 더 나간 듯한 느낌이다. 뭔가 익숙하다 익숙하다 했더니 이건 흡사 귀여니 소설이 아닌가? 인물들은 동네의 그저 평범한 소년 소녀 들이지만 하는 행동들이나 영향력은 전국구 깡패거나 아이돌 스타와도 같이 그려졌던, 한 때의 시대의 아이콘이자 심지어 영화로도 다수 만들어 졌던 그 인터넷 소설 말이다. 그 보다 더 이전에는 슬램덩크에서 그런 정서를 찾을 수 있었다. 족히 3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고3선배들의 비주얼 하며, 전국 대회 레벨도 아닌 도내의 고등학교 선수의 레벨이 프로 선수들을 쌍싸대기 칠정도로 그려졌던 그런 정서 말이다. 이 작품들의 '만화적인 상상력'은 평범한 주인공 주위의 환경을 무림 강호로 만들어 모험의 장으로 삼았었다.


역시 전편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뼈대는 스파이더 맨에서 빌려 온 듯한 이야기다. 킥 애스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레드미스트는 킥 애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라 그를 헤칠 궁리에 몰두한다. '우연찮게' 거액의 유산도 생겼겠다 고수들에게서 무술을 전수 받아 그 목표를 이루려 하지만 그게 하루 이틀에 될리가 있나. 조금 배우다가 차라리 돈을 주고 사버리게 되는 레드미스트, 아 레드미스트였던 '머더퍽커'. 그런데 별 무리없이 엄마가 등장했다가 극에서 퇴장하고 별 감정의 동요도 없이 거액의 유산으로 사람들을 산다는것도 황당한 전개지만 여기에 더해 그 옆에서 싸움 코치 역할을 하고있는 사람이 '척 리델'이라면? 심지어 다른 역할로 척 리델이 출연한게 아니라 척 리델이라는 인물 그 자체로 출연하고 있으니 철없는 고딩의 망상이라기엔 심히 언발란스 한 묘사이질 않나.ㅎ 마치 귀여니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거기다 별 감정의 고조 없이 그저 고용하니 팀원이 되었다는 식으로 모여드는 머더퍽커의 팀은  그저 머더퍽커가 멋들어진 별명을 만들어 주는것으로 관계가 만들어지는데 가장 큰 방점을 찍게 된다. 너무 인종차별적인 이름짓기가 아니냐는 주변인의 평가가 양념처럼따라 붙을 정도로 흑인 격투가에겐 '블랙 데쓰'라는 이름을, 러시아 출신의 살상 전문가에겐 '머더 러시아'라는 위악적이고도 유치한 이름 짓기가 이어진다. 이는 힛걸에게 수련을 받으려다 계획이 틀어지자 팀을 구성하는 킥 애스 무리에 있어서도 비슷한 전개로 이어지는데 전직 마피아 였다가 종교의 힘으로 새사람이 된 군복 차림의 사내는 '슈퍼 캡틴'에 물리학 교수라는 뻥을 쳤던 사내는 '미스터 그래비티'가 된다. 그리고 그 별명에 걸 맞은 의상은 보너스. 


그런데 마치 할로윈 의상같은걸 입고서 유치한 이름을 짓고 팀을 만들어 하는 짓들이 정말로 피와 살이 튀는 살상극이니 여기서 오는 괴리가 이 영화가 가진 개성의 핵심인 것이다. 사실 다른 '진짜' 히어로 영화들의 인물도 위의 상황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손에서 발톱같은게 나오는 사람은 족재비과의 '울버린'이 되고 자기장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매그니토'가 되는 지경이니. 그런 유치한 의상과 이름을 가지고 그 인물들은 세상을 구원할 갖은 고초를 진지하게 겪게 되니 사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그 상황이란건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나 다름 없다. 한 두번의 시도가 그런 모습이었다면 나름 인정해 줄만한 요소가 있었겠지만 이제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는 영화들 중에 그런 히어로 무비가 아닌 영화를 찾기가 어려워 질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좀 더 진지하게 '보이려는' 시도마저도 식상해질 지경이다. 


오히려 히어로 무비가 가진 유치함을 정공법으로 극상까지 끌어올리자 그에 대한 풍자와 비슷한 효과가 발생한 결과물이 이 영화인거다. 글쎄 뭐 히어로 물이 그렇게 풍자의 대상씩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거기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히어로 물의 정수로 받아들일지 풍자물로서 받아들일지의 여부도 알 수 없으며 애초의 목적이 풍자였는지도 알 수는 없으나  어쨌던 신선하긴 했다. 물론 이런 시도가 3편으로 까지 이어 질 지는 장담 못하겠다. 정황상 밑밥은 깔아놓은것 같지만 2편의 흡인력은 본편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3편까지 나온다면 과연 볼 생각이 들지 잘 모르겠다. 힛걸이 또 나온다면 모르겠지만.







#1. 아놔, 쿠키 영상이 있었다네? 뭐야 이거, 검색해도 뜨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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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차도 특이한 '화이 (여진구)'는 특이하게도 아버지가 다섯이다. 그 면면은 그러나 한 대상을 다섯으로 쪼개놓은듯 단선적이다. 그리고 화이는 그 다섯 각자를 모두 아버지라 부르며 지내고 있다. 각자 형제로 칭하는 그들에게도 '형수'가 있는데 그 여인은 이 다섯 사이에서 사슬에 발목이 묶인채로 지내고 있으며 화이는 이 여인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지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들 다섯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는 여인이 혈연관계가 아님을 알고 있으며, 애초에 그렇게 지내 왔기에 별다른 저항을 겪지 않고 서로 그 관계를 인정하고 살고 있을 뿐이다. 수 많은 억압속에서 지내온 '어머니' 역시나 이제 발목을 감싸던 족쇄가 풀렸음에도 두목격인 석태(김윤석)를 남편으로, 먼 옛날 '아버지들'이 유괴해온 화이를 아들로 여기며 살고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감독인 장준환이 밝힌 바를 보자면, 돈을 받고 살인을 저지르는 석태 무리가 분재를 다루는 화원을 위장 운영하고 있다는 점은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멀쩡히 두어도 잘 자랄 식물을 인공적으로 힘을 가해 기형적인 모양으로 뒤틀리게 해 놓고 그 아름다움을 논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들은, 특히 석태는 나무를 이리저리 뒤틀어 '아름다운' 분재로 만들듯이 화이도 그렇게 아름다운 분재로 만들려고 한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자신들이 이 세상을 지내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살인 기술들을 대신에 가르친다. 정작 화이는 그림에 흥미를 가지는 여린 아이이지만 석태에게 화이의 여린 감성은 그저 쓸모없는 감상일 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화이는 자신만큼의 괴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괴물이 보인다며 두려워 하는 화이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우화와도 비슷한 이야기는 그러나 현실적인 질감을 잊지 않는 영리함을 역시 갖고 있다. 화이의 '가족'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 비현실적인 설정이 종종 잊혀질 정도로 이들의 액션 및 그 계획은 현실적이다. 마치 고대의 신화와도 비슷한 구도의 인물들이 액션마저 마법이나 경공술을 쓰는것이 아니라, 피가 뚝뚝 흐르는 고어 장르에 가깝게 구현해 보이니 이 기묘한 엇박자는 독특한 개성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지나치게 어둡다거나 잔인하다는 평을 한다. 여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종의 '하이틴 액션물'로서 관객에게 다가서기엔 많은 관객들이 당황스럽게 생각 할 수도 있다는 말인건데, 오히려 이 엇박자가 이 영화가 말하려는 핵심이 아닐까 싶다.


부모 세대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부조리마저 '세상'이라며,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알아야 한다며 자신들의 틀에 가두려하는 폭력은 신화가 신화이기 이전의 시절 부터 이어져온 반복이다. 이를 역사라하기엔 지금까지도 유효한 현상이니 차라리 그저 반복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듯 하다. '제우스'가 애저녁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 살아남은 신화가 되는 동안 부모의 이 '폭력'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남은 신화이니, 오랜 역사를 지닌 신화인 동시에 지극히도 현실의 일인 것이다. '크면 다 알게 된단다'라며 당장의 곤혹스러운 질문에 유예기간을 두는 '그 들'이지만 과연 커서 다 알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클 때까지 둔 유예기간 동안 자신과 같은 부조리를 가진 존재로 다듬어 내게 되는 것일까? 크면 다 알게 된단다라는 포장으로도 쉽게 마감처리 되지 않는 의문은 곧바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여져 본능에 가까운 분노로 표출 되곤 하는데,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앎이 과연 앎이냐 하는거다. 그건 오히려 '이렇게 알지 않고서는 넌 사람이 아니다, 혹은 다 큰게 아니다' 라는 협박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나 '부모'가 되고 나면 자식 앞에 드러난 자신의 부조리가 '세상'이 되지 않고서는 자신이 살아야 하는 근거가 없어지게 되므로, 크면 알게 된다며 벌어놓은 시간동안 자신의 세상에 알맞은 분재가 되도록 아이의 가지에 철사를 감게 되는거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비로소 한 아이의 부모는 자신의 부모에게 '이제 세상을 알겠어요'라는 고백을 하게 되면서 '크면 다 알게 된단다'라는 부모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 실현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불편하다고 하는 이면에는 잔인하게 피가 튀는 장면보다도 이런 문제제기를 하고 있기에 그런것이 아닐까? 모두가 아무런 의심없이 아이의 팔에 철사를 감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이의 팔에 철사를 감는 대신 왜 내 팔을 어그러뜨렸느냐는 항의를 내 부모에게 하지도 못하는, 마음속 깊은 곳의 원죄와 비슷한 그 무엇을 건드렸기에. 








#1. 요즘들어 여기나 저기나 개성이 있네 없네로 말들이 많지만 

     그야말로 개성이 존재의 이유가 될 만한 수작을 만나게 된 것 같다. 

    앞으로도 쭉 지구를 부탁합니다, 장감독님.


#2. 화이는 과연 괴물이 된걸까?

     괴물을 삼켜 버렸다는건 그걸 초월했다고 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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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소송사건(Bananas!*)'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다국적 과일회사 '돌(Dole)'이 독성 농약을 사용하여 농장 노동자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을 다룬 내용이다. 일단, 난 이 작품은 보지 못했다. 내가 봤던것은 ebs였는지 kbs였는지에서 다큐멘터리 축제를 하면서 편성했던 '바나나 소송사건 그 이후(Big Boys Gone Bananas!*)'였는데 이게 참 걸작이었다. 걸작이라는 표현은 작품 자체로서도 흡인력있게 잘 만들었다고 평가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반어적인 표현으로 '참 하는 짓들이 걸~작이다~'의 의미이기도 하다. 별생각없이 만만하게 마트에서 고르던 바나나의 그 귀여운 스티커를 이다지도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붙이고 있었다니... 이 거대 기업은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낸 '바나나 소송사건'이라는 다큐영화를 이세상에서 '박멸'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해외 영화제에 이 작품을 내리도록 압력을 가하는가 하면 각국의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해 영화가 상영되는것을 막기도 한다. 물론 그 와중에 각종 소송이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것은 기본이고. 그리고 그 결과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거실 소파에 누워있던 나에게 까지 전해지질 않았는가. 거대 회사는 참패하였고, '힘없는' 소규모 다큐제작자는 이겼다. 이 '작은'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여드름을 짜내려다 자신의 손이 그 상처를 덧내는걸 인식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지. 사람들은 그저 먼나라의 농장 노동자들이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보다, 그 거대기업이 정치인과 언론을 동원하여 자신들을 핍박하고 억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자 그저 공분의 의미를 넘어서 공포로 무장하게 되었던거다. 마트에서 만만하게 바나나를 골랐던 사람들에게 두 다큐의 의미는 같지 않았다. 기업의 행태는 같았을 지언정.


본작의 이야기를 해보자. 사람들은 이 다큐의 내용을 접하기 보다 이 다큐가 세상에 나오자 이 세상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를 먼저 보고 있다.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제기되고, 기각되고, 멀티플렉스 체인점에서 조그맣게 상영이 되었다가, 돌연 취소되었다. 긍정적 현상인지 부정적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영화 이상의 의미를 벌써부터 갖게 되었다. 내용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는 외려 뒷전으로 밀려난 채로. 이제껏 보아왔던 많은 한국사회의 논쟁거리가 그래왔듯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알맹이에 대한 판단은 사라진채로 유치하지만 살벌한 힘겨루기와 소득없는 감정싸움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이래선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지만 어느 한쪽도 뭘 얻지는 못하는 소모전이 되고 말 뿐인것을. 정작 중요한 알맹이를 놓고 본다면 이게 그렇게나 흥분해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를 대하듯 할 내용은 아니란걸 알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래, 이 글에서도 이제서야 이 영화에 대해서 좀 설명할 수 있을것 같다. 가장 먼저 든 기분은 어렵지 않다는거였다. 사실 개인적으론 천안함 사건 당시엔 온갖 정보의 홍수속에서 어떤 정보를 취합해서 판단에 활용할 것인지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 그 정보들은 하나같이 물리학등의 각종 과학적인 사전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들이었고, 그래서 대체로 전문가들의 의견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사람 말이 다르고 저 사람말이 다르니 애초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로는 천안함의 조사 결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어떤 확신을 갖고 있기보다는 종교적인 믿음에 가깝게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다루는, 정말로 폭발이 있었다면 그 엄청난 열이 왜 사고 직후의 열 화상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는가와 같은 그저 간단한 논리적인 차원에서의 의문에는 어떤 과학적 사전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심지어 이해를 돕기 위해 비슷한 열로 쇠를 달구고 대형 수조의 물에 담근 후 얼마동안 그 주변의 물이 달궈진 쇠와 비슷한 정도의 온도를 띄는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건 뭐 빨간펜 첨삭지도 수준이다. 거기다 처참하게 두동강난 배가 곧바로 폭발의 증거가 되는것은 아니라는, 다른 과정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을 개연성을 풀어내는 부분에서는 일찌감치 수학포기 문과생이었던 나로서는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그 복잡한 내용이 이해가 다 되게하는 기적을 행해 보였으니.


물론 쉽다는 말은 그만큼 첨예한 부분을 많이 비켜갔다는 말일 수도 있을 테다. 실제로 천안함에 대해서 많이 들고 팠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다루지 못한 많은 쟁점들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들도 이 영화를 우선 영화로 본것이 아니라 천안함이라는 쟁점에 대해 유리한 입장에 서게 해줄 동료 정도로 판단한 측면이 크지 않을까? 영화가 한정된 시간안에 다루기엔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의 논란이 있다. 아마 그걸 다 다루면서, 이 영화 한편으로 모든 논란을 끝내리라 생각했다면 아마도 영화는 실패한 졸작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대신에 역설적으로 이렇게 '밍숭맹숭'하게 만든 영화가 온갖 영화외적인 풍파를 겪으면서 절절히 보여주는 생생한 현실이 있질 않는가. '아니... 이 정도도 안된다고?'


아마 내가 한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외국인이었다고 친다면, 이 작품을 마음놓고 흥미로워 했을 것 같다. 촌스럽게 감독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지도 않았으면서, 복잡한 사안에 대한 탐구의 과정이 어렵지 않게 펼쳐져 보였다. 거기다 영화 내에서 부터 이미 감지 되고 있었던 '자기 검열에 대한 요구'가 스크린 밖의 세상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생생하게 느껴지질 않는가. 마치 제 3세계의 농장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 및 착취가 선진국 영화제작제에게 어떤 모습으로 재현되는 지를 내가 흥미롭게 지켜봤던 것처럼, 천안함 이라는 단어로 취합되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곳이 나의 터전이 아니었다면 난 또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을. 이 흥미로운 작품을 앞에 두고 일단 비분강개하고 분노의 게이지를 한껏 올려놓아야하니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나. 이건 천안함이 폭침이냐 좌초냐의 진실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다. 천안함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는것이 아니라, 이정도의 가벼운 의심에도 전방위적인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천안함 사건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와중에 나의 가장 큰 염려는 이거다. 이긴다는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스웨덴의 '프레데릭 예르텐'이 이겼던 것처럼 한국의 '백승우'도 이길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천안함 프로젝트, 그 이후'가 나올 수 있을까? 이 암울한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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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추석 선물세트들이 돌아다닐 때가 되었다. 참치나 햄 통조림, 치약 및 샴푸나 식용유등이 명절 선물세트라는 이름으로 구성되어 매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팔려나간다. 이전처럼 먹을것이나 물품이 귀하던 시절과는 다르게 선물세트의 구성품들은 선물이라고 하기엔 이제 그 지위를 많이 잃었지만, 신기하게 많은 사람들이 저러한 물품을 '선물'로 준비하고 주고 받는다. 물론 선물로서의 지위는 잃었을 지언정 나름의 경쟁력을 갖고 있기에 여지껏 세트로 구성되어 팔려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어린 왕과 권력욕에 불타는 숙부, 천한 신분에서 최고의 권세가로 올라선 입지전적인 지략가, 반역의 무리를 막아선 당대의 실력자등등 수양대군의 이야기는 언제봐도 참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매력이 때가되면 꺼내어져 소진되니 마치 명절마다 돌아오는 선물세트를 보는 듯 하다. 그래도 예전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기억에서 잊혀질 때 쯤 다시 꺼내어지곤 했으나 요즘엔 미처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수양대군, 단종, 한명회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더구나 팩션사극이라는 외피까지 두르고 있으니 그 평범함이란게 거의 특별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근 몇년동안 사극이라는 이름을 걸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새로운 창작의 나래를 펼쳤던가. 개별 작품들의 완성도를 떠나서 이제는 팩션 사극이라는 시도자체가 애초의 새로움의 이미지를 벗어나 성의 없음에 가까운 고정관념을 주게 될 정도가 되었다. 이전처럼 먹을것 없고 물품 귀하던 시절이라면 피가되고 살이될 선물이었겠지만, 모든것이 풍족해진 지금은 유별나게 감동이 담긴 선물이 되기엔 부족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올해 나온 '수양대군 선물세트'에는 좀 색다른 구성이 포함되어 있다. 1차적으로 보면 그 유명한 단종과 수양대군의 이야기에 관상이라는 요소를 집어넣은 것일 테다. 이 고고한 역사의 큰 흐름앞에 역적 가문의 후손으로 숨어지내던 관상쟁이가 휘말리게 되는 구성이 이 영화의 히든카드 인듯 하다. 그리고 이 유명한 사건은 관상쟁이 '내경(송강호)'에 의해 관상에 따른 인과관계로 재해석되어 오묘한 분위기를 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양대군 선물세트의 존재에 대해 잘 모르는, 더구나 관상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이 작품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전 정보에 의한 진부함을 떨쳐버린 후라면 언제라도 매력적인 이야기에, 얼굴 생김새로 사건의 앞뒤를 예상하고 풀어가는 인물의 등장이라. 끌리지 않는가?


그러나 애초에 우리가 기대하게 되었던 수양대군 선물세트와 관상의 비중과 비교해 봤을 때 생각보다 무게 중심을 더 많이 두고 있는 부분은 내경과 그 아들 '진형(이종석)'의 부자간의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의 인과관계상 내경과 그 아들의 이야기가 주요하게 다루어져야만 하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저 수양대군 선물세트의 연결고리로만 생각하기엔 적지 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봤다. 그에대해서 말하기 위해선 일단 이 영화가 관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게 필요한데, 이 영화에서 관상이란 일종의 노하우와 같다. 한 인물의 성격이나 주위 환경은 얼굴 생김새와 행동 및 습관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으며, 그러니 예민하게 이를 집어 낼 수 있는 사람은 한 인물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상당히 높은 확률로 짐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다. 극속에서 관상쟁이가 내경만 있는건 아니었지만, 학습치와 경험치면에서 그 예민한 짐작을 거의 쪽집게처럼 해 낼 수 있었던것은 내경 뿐이었다. 그리고 관상을 보는 것에 대해 극도로 거부감을 느끼며, 역적 가문의 후손이라는 굴레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은채 세상에 나가고자 했던 내경의 아들 진형이 내경만큼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읽어 낼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진형은 관직에 나가면 험하게 죽을상이라며 진형이 세상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말렸던 내경이지만, 관상이나 운명을 믿지 않았던 진형에겐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픈 욕구가 들끓을 뿐이다. 


급격히 기운 가문에 낙심하여 죽을 결심을 했던 내경을 살게 했던 아들 진형, 아비가 어렸을적에 건사를 잘 못해서 아들 다리를 절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한숨짓게 만드는 아들 진형. 이 절절한 부성은 또다른 노하우를 떠올리게 한다. 온 인생을 통해서 겪어낸 노하우와 이를 바탕으로 자식에게 좋은 길을 만들어주고 픈 아비와 그 바람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들의 이야기 같은...뭐 그런거 말이다. 아비의 온갖 좌절과 아픔, 고난과 성취 같은 것들이 빚어낸 이 세상에 대한 통찰은 그러나 아직 어린 아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버겁기만 하다. 그 아비조차도 온 인생을 통해 알게 된것을 어찌 말 몇 마디로 다 이해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통찰이라는 것도 아들 세상에 와선 쓸모없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불속으로 뛰어드는 아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아비의 그 초조함이란 언제나 되풀이 되는 비극인 것이다. 그저 서서 '잘 해보거라'라며 기대섞인 응원을 보낼 수 밖에.


그러나 관상에서 시작해 절절한 부성애를 거쳐 도착하게 되는 이 영화의 '운명론'에 대한 입장은 어떻게 취하고 있는것인지가 확실하지는 않다. 한결같이 운명을 이겨 낼것이다, 그의 장담은 결국 틀렸다라던 극중의 사람들은 결국엔 관상쟁이가 예견한 운명에 맞게 그 최후를 맞게 되었다. 심지어 그 자신도 바람을 보지 못하고 그저 바람이 일으킨 파도만을 봤을 뿐이라며 자신의 '재주'를 낮추지만, 결국엔 그 바람이라는 것이 미래를 내다본 사람이라도 어쩔수 없는 정해진 운명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가장 강력한, 운명론에 대한 귀의가 아니겠는가. 물론 운명을 내다 본다고 파도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반면에 정작 그 운명은 실행되지 않았으나 그 운명론에 대한 걱정으로 가장 고통스러웠다고도 토로 하고 있지만 말이다. 


소재의 특성에 완전히 녹아들고자 했음인가;;; 마치 사주,관상을 보고 나온 양 잔뜩늘어놓은 변죽을 보고 난 뒤의 헛헛함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1. 김종서에 대한 분배(?)가 아쉽다. 

    수양에게 맞서는 실력자 김종서의 행동을 그저 선왕에 대한 충심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권력 싸움으로 봐야 할까?

    최소한의 설명이 있었다면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2. 이로서 송강호 위기론은 지층아래 화석으로 묻히게 되었음.

     개인적으론 '냄쿵민수' 보다 '내경'이 송강호의 매력을 더 잘 살린걸로 봄.


#3. 납득이의 꽈배기는 잊어라.

     송강호,조정석 콤비의 춤에는 어떤 이름이 붙게 될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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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감독인 닐 블롬캠프의 '디스트릭트9'의 연장선에 있다. 그 영화와 마찬가지로 구역의 분리로 빈민내지는 피지배층과 상류 시민내지는 지배층이 나뉘어 있다. 피지배층의 삶이란 지저분하고 처절하기 이를데 없고, 지배층의 삶이란 밝고 깨끗하며 여유롭다. 자신들의 밝고 깨끗하며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지배층은 사람들을 그들만의 구역안에 묶어 놓으려 한다. '디스트릭트9'에선 마치 외세의 침략자들이 원주민을 일정 구역안에 몰아넣고 온갖 나쁜 이미지를 덮어씌우며 핍박했던 모습을 외부에서 온 외계인들을 통해 재현해 보였고, 본작에 있어서는 말그대로 위성도시인 엘리시움에 사는 상류층과 그대로 오염된 지구에서 사는 하류층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보다 단순해진 묘사가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게 문제다. '디스트릭트9'에선 지배세력의 고위층의 사위로서 외계인들에 대한 핍박의 선봉에 섰던 주인공이 우연한 사고로 외계인이 되어가면서, 오히려 핍박을 가하던 시스템에 대해서 도전하게 되는 모습을 그렸다. 엇비슷한 맥락에서 그동안 온갖 나쁜 이미지들을 뒤집어 쓰면서 살아올 수 밖에 없었던 흑인들이 외계인들에 대해서 온갖 편견에 사로잡힌 분노를 쏟아내는 장면을 보여주며 일종의 전복의 쾌감같은걸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전복의 장치가 있었다면, 화면 구성에 있어서는 그렇게 새롭다고만도 할 수는 없는 뉴스화면 처럼 구성한 인터뷰의 활용을 통해 영화가 '쿨'해 보이는데 기여를 했다. 그렇게 '디스트릭트9'은 독특한 영화가 되었던거다. 


그러나 본작은 평범한 액션물이 되고 말았다. 빈민인 주인공 맥스(맷 데이먼)도, 엘리시움의 실력자 델라코트(조디 포스터)도, 살인귀 크루거(살토 코플리)도 시작부터 끝까지 쭉 다 평면적인 인물들 뿐이다. 애초에 엘리시움에만 존재하는 치료기(?)가 없으면 5일안에 목숨을 잃게 된다는 절박한 상황이 맥스를 위험한 상황에 대한 도전으로 떠밀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에서 시작해서 끝에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이라는 큰 가치를 이루게 되는 과정에서 그가 고민할 수 있는 시간 따위는 없다. 그래서 애초에 맥스가 그걸 다 인지하고 행동에 나서게 되는지, 영화 주인공 맥스를 밑바닥에서 태어나 영웅이 된 인물로 생각해도 되는지 의문이 든다. 어차피 엘리시움에 올라선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뭘 피하고 어쩌고 할 선택지 자체가 주어지지를 않는단 소리다. 그러니 그의 '희생'에 대한 감동이 반감될 수 밖에.


물론 전작과 엇비슷한 노선을 보이는 부분도 있다. 빈민가에 대한 묘사는 디스트릭트9과 엇비슷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가지는 묵직한 무게감이 있다. 빈민가 사람들의 생활은 그 흙먼지 하나 하나로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된다. 영화의 핵심인 엘리시움도 허황되거나 진부할 수 있는 함정에서 벗어나 환상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위용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일단 그 부분에 있어서 가질 법한 기대는 누구라도 다 만족할 것 같다. 거기다 말로 표현하기엔 부족한 '변태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한 신체의 훼손과 재생의 묘사는 그 자체로 큰 쾌감이었다. 그 한없이 현실적이면서도 지극히 변태적인 감성만은 아직 죽지않고 그대로 였다.


여러모로 아쉽다. 훌륭한 배우들을 데려다 놓았음에도 그들이 활약할 장은 '위성도시'만큼의 크기도 되지 않았다.[각주:1]하위층에게 주어지는 의료시스템의 문제, 잘나가는 서방과 그를 떠받치고 있는 제3세계의 구도등을 간G나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영화적인 재미가 있고 난 다음의 문제인 것을. 뻥튀기 된 자기반복이라는 평가 이상을 내리기는 힘들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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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디 포스터를 그렇게 쓰고 버리는 사람이 어디있나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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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 특공대 같은 팀이 꾸려졌던 모양이다. 영화는 지구로 향하는 혜성에 대응하기 위해 나섰던 그 팀이 '실패' 했다는 라디오 뉴스로 부터 시작한다. 인류는 더이상의 생존에 실패하게 된거다. 남은 시간은 21일, 그 뒤로는 모든게 다 끝이다. 그렇게 되자 이제 전인류는 공통의 관심사 하나에 몰두하게 된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생각보다 모든 룰이나 법규가 모두 무시되는 아비규환의 난장판은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나, 일단 영화의 시선에 들어온 부류는 '될대로 되라' 족. 솔로로 죽을 순 없으니 되는대로 짝을 지어주려던 친구에다, 술김에 주인공 도지(스티브 카렐)에게 딥 키스를 날리는 그 친구의 부인. 난생 처음 술을 홀짝거리는 꼬맹이에다, 미워하던 사람에게 찾아가 속시원하게 욕을 해주겠다는 사람까지. 심지어는 날마다 파트너를 바꿔서 즐기고 있다는 한 너드는 이제 여자들이 피임이며 자신의 외모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행복해 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 도지는 그저 집에서 조용히 최후를 맞을 생각이었다. 어느 우연한 사고를 겪기 전에는.


우연히 만난 옆집 여자 페니 (키이라 나이틀리)와 길을 떠나게 된, 아니 어쩌다 보니 폭동의 무리를 피해 같이 길을 떠나게 된 도지다. 일단 떠나고 난 후,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함께하기로 한 둘. 사실은 페니에게 비행기를 타고 가족에게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게 먼저였으나 비행기까지 가기 전에 차의 기름이 바닥났으니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 이어지는 진행은 기대에 크게 벗어남이 없는 밝고 유쾌한 죽음 맞이하기이다. 온갖 오해와 갈등으로 괴로웠던 관계들이 회복되고 두려움 없이 서로에게 다가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이차이도, 외모도, 돈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사람과 사람이라는 순수한 이유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사랑할 이유가 된다. 


공원에 사는 개이름, 'SORRY'라지요~♬

                      


 이 영화와 조셉 고든-래빗 주연의 '50/50'을 같이 놓고 보는건 그리 무리한 시도는 아닐테다. 그 영화에선 주인공이 50% 생존률의 난치병에 걸린 후,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게 되는가를 다루게 되는데 이건 마치 전 세계인을 시한부 난치병 환자로 만든 스케일이 아닌가 말이다. [각주:1]  두 이야기 모두 비로소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사용하는 이야기들이지만, 거꾸로 그건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여성들이 너드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던건 그저 작당해서 너드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구 종말이 다가오자 기회가 늘어난건 그 계산이 필요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었고. 만약 거짓말 같이 종말에서 비껴난다고 해서 그 기회가 종말을 앞둔 때와 같이 주어지게 될까? 다시 기회가 없던 시절의 너드로 돌아가게 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특수한 상황에서 감정의 고조를 겪는 사람들의 화해와 사랑은 아름답고도 슬프지만 그건 특수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삶을 살아갈 사람들에게는 별로 도움될게 없는 이야기다. 영화 '스피드'에서 산드라 블럭이 그러지 않던가, 극적인 상황에서 만난 인연과는 사랑에 빠지는게 아니라고.


굳이 모두가 다 죽고 말거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서 이 사람도 소중하고 저 존재도 소중하니 모두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일종의 협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이런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난 후에는 늦으니 잃기 전에 행동하세요' 같은. 그건 삶의 수많은 평범한 상황들을 볼모로 잡아버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만약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겠다는 일념으로만 삶의 순간들을 겪어 낸다면 그 삶은 어떻게 될까? 심지어는 그러고도 놓친 소중한 사람이 존재 할 수 밖에 없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을 그저 내탓으로만 돌리고 그저 견뎌내라는 말은 성취될 수도 없는 목표거니와 건강한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도 장애물일 뿐이다.  갈등이 있다면 욕하고 싸울수도, 안보고 살수도 있어야 한다. 죽고 죽이는것보다는, 이 관계에서 쌓인 울분을 다른 관계에다 푸는것 보다는 나으니까. 안보고 사는것에 대한 괴로움이 편안함 보다 크다면 그 사람이 한발짝더 다가서면 그뿐, 왜 다른이의 협박에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염려하며 지금의 내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걸까? 


사람의 성격과 마찬가지로 관계도 기승전결과 엇비슷한 흐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관계의 가장 행복한 순간만을 대표 이미지로 떠올리지만 어떤 관계라도 그 관계가 이유가 되는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건 상대와 나의 노력의 여부와는 별도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평생을 아름답게 사랑하고 짝을 먼저 떠나보내게 된다면 그 아름다웠던 사랑도 절망의 이유가 되는거다. 이 사례라면 아름답게 사랑했던 시절도, 짝을 떠나보내 절망하게 되는 시절도 모두 그 관계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웠던 그 시절만을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봐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절망과 괴로움과 후회도 모두 나름대로의 지분이 있는 감정들이며 어느정도는 모두 필요한 것들이다. 어떻게 발악을 해도 결국은 따라 붙고 말 감정들이고. 


물론 지구가 작살날 시간이 21일 쯤 남았다면 또 모르겠다. 그 때라면 나도 내안의 간디를 이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러기 전에는 보기 싫은 사람 안보고 하기 싫은 말은 안하고 맘에 안드는 사람과는 싸우면서 살고 싶다, 되도록이면. 그리고 배 곯고 난 후 음식이 당기듯이, 관계가 주는 괴로움보다 행복감이 더 당기게 되는 때가 오면 뒤도 안돌아 보고 그 관계를 향해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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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영화의 감독이 50/50의 감독이 아니었나 싶었지만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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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윤영화(하정우)에게 테러란 일상과도 같았을 것이다. 먼 곳에서 부터 전해지는 텍스트와 화면으로 접하는. 그런식으로 윤영화의 입을 통해 전해진 테러들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그러나 어느새 사고를 치고 아침 라디오 방송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난 그에게 다가온 테러는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줄 동아줄에 다름 아니었다. 심지어 별다른 노력도 없이 맞이 하게된 테러범의 전화라니, 이건 일생 일대의 행운이질 않은가. 그러다 그 테러의 위협이 바로 자신의 귀에도 꼽혀서 삑삑거리고 있음을 알게 된 이후에는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테러의 위협에 몸서리를 치게 되는 그이다. 시간이 좀 더 흐르게 된다면, 윤영화에게 테러란 어떤 의미로 다가가게 될지...





아주 '쫄깃쫄깃한' 영화다. 근래에 보기 드물정도로 밸런스가 잘 맞아 돌아가는 한국 영화라고 평하고 싶다. 전화로 테러범과의 심리 싸움을 벌인다는 설정 자체가 그렇게 쇼킹할 정도로 새로운 것은 아니나, 좁은 방송 중계석에서 윤영화가 접하게 되는 테러에 대한 압박이 다양한 차원에서 숨막힐 듯이 전해진다. 방송 모니터를 통해 사건 현장을 바라보게 했다가, 카메라를 밖으로 돌려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을 멀리서 잡았다가, 핸드폰으로는 정부에서 나온 대 테러 관계자와 문자를 주고 받으며 방송으로는 테러범과 밀당을 했다가... 이런 전환들이 미처 하정우가 헛개수 먹방을 하고 있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할정도로 숨막히게 이루어 진다. 거기다 긴박한 상황에 휘말리지 않겠다는듯이 한번도 평정심을 흐트리지 않는 정부의 대 테러 요원역의 전혜진은 관객과의 밀당에 있어서 중요한 무게추가 되어 준다. 


그러나 이런 장르적 성취에도 어딘가 모르게 아쉬운 부분은 있다. 테러가 이루어지는 메카니즘이 더 자세하게 묘사 되었다면 장르적 쾌감이 훨씬 배가 되었을 텐데 애초에 그런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보다 '어찌 어찌해서' 각종 사회 시스템을 뚫어내고 엄청난 화약까지 손에 넣은 절대적인 능력의 테러범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뿐이다. 겉으로는 테러범과의 밀당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 테러범은 실제의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정보'를 넘어선 오감으로 관객들을 자극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정체가 드러나는 대목도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다.  


영화는 테러범과 테러에 집중하기 보다 그 테러를 접하는 인물들을 더 중점적으로 다루는 듯 하다. 이를테면 애초에 신고조차 미루고 같이 대박한번 내보자는 부추김에 그를 따르려 했던 윤영화의 라디오 프로그램 피디는 티비 생중계라는 큰물을 선택한 윤영화에게 물을 먹게 되고, 테러범과의 전화연결을 카드로 한 윤영화와 자리복귀를 거래했던 보도국장 역시나 어디까지나 윤영화를 거래의 도구로 볼 뿐이다. 애초에 테러가 동아줄에 불과했었던 윤영화와 같이, 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제 3자의 사정은 그저 부차적일 뿐 자기앞에 놓인 이권에만 매달린다. 사람들이 다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저지른 일이니 잘못한게 아니라는 테러범에 대해서 누구 하나 나서서 당당 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장르적 완성도를 살짝 비껴가면서도 이른바 '사회 고발 영화'의 전형에서도 비껴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찰, 행정, 언론등의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시스템 속의 난맥상이 이 테러 속에 녹아 있지만 그 난맥상이란건 장벽 바깥의 뿔달린 도깨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시민이라고 자기 스스로를 포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었던 거다. 그리고 그 난맥상이 모이고 모여 뿔달린 도깨비가 만들어 지는거고. 앞서 말했던 '사회 고발 영화'들을 보면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그래서 저런 영화를 만들어서 뭘 어쩌자는거지? 저 영화 보고 사람들이 나서서 대신 시위라도 해 주길 바라는 건가?' 였다. 그런 영화에는 다른 이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희생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는 도깨비들이 나오지만, 정작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기는 그 소재로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 및 제작자와 8000원에 부당함에 대한 부채감을 갚으려는 관객들 역시나 마찬가지로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남의 상갓집에서 한판 잔치라도 벌이는 듯한 모양새로 말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까지 어느 쪽에 더 무게 중심을 두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사회의 부조리와 난맥상을 전달하기에 소흘하지 않기로 한것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최고 블루칩 하정우와 쫄깃쫄깃한 영화적 쾌감이 아니면 이 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았을 것임을 잊은것 같지도 않다. '나 이렇게 고생해서 이런 말도 했어요, 뿌잉뿌잉'하기 보다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있는 사람들의 이정도 프로페셔널한 결과물이라면 드러 내놓고 뿌잉뿌잉하는 결과물보다는 훨씬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면에서 지지와 응원을, 그에 앞서서 훌륭한 생산물에 대한 찬사를 보낸다. 


더불어 이제는 식상해진 배우 하정우에 대한 찬사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과연 하정우가 아니었다면 누가 윤영화의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었을까? 연배를 좀 올려서 선배격인 배우들까지 포함 시킨다고 해도 꼽을 만한 후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좁은 라디오 부스에 갇혀서 한시간여 이상을 테러범과 보도국장과 대 테러 요원한테 시달려야 하는 이 엄청난 미션 앞에 그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냉정한 계산은 어김없이 효과적이었다. 단언컨데, 배우 하정우는 지금 한국 영화계에 있어서 최고의 선물이다.[각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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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eat. 병헌 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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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에 대항하려던 국제사회의 시도는 빙하기라는 결과물로 되돌아오게 되고, 그 빙하기 와중에 '공전주기'가 1년인 열차만이 얼마간의 사람을 싣고 마치 위성과 같이 지구를 달려나가게 된다. 또 다른 생태계나 마찬가지인 그곳에서는 또다른 계급이나 마찬가지인 구분들로 사람들이 나뉘어 있고, 가장 하층민으로 핍박받고 살고 있는 꼬리칸 사람들은 다시한번 판도를 뒤집을 혁명 혹은 반란을 준비 중이다...> 



이 정도가 설국열차의 간략한 줄거리 되겠다. '국인이라면 이 화 응원해 줍시다' 3연작 시리즈의 대망의 마침표를 찍는 작품이자 어마어마한 제작비와 어마어마한 캐스팅이 봉준호라는 상품성에 더해져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기대를 불러 모았던 작품. 그러나 거꾸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최우선의 강점은 돈들인 티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건 테러에 가까운 평점을 난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먼저 다가오는 약점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유명 배우들의 캐스팅, 한국 영화사상 최고액의 제작비라는 이미지들로 기대를 부풀려왔던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일반적인 기대가 일종의 배신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물량으로 수식되는 영화들에 대한 기대라면, 적절한 수준의 스펙타클, 적절한 수준의 쾌감등의 스토리 외적인 '자극'을 들 수가 있겠는데 사실 이영화는 그런 쪽은 아니다. 나도 영화를 보기 이전에는 열차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어떻게 극복할 지가 주요 관전포인트 중의 하나였지만 애초에 이 영화는 그런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듯 하다. 오히려 공간의 한정성을 이야기의 흐름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이용하고 있으며, 그러니 몇 번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류의 영화들에서 기대할 수 있었던 특징들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물론 나에게는 그런 점들이 오히려 좋아 보였다. 마치 왕년의 성룡 영화에서 같은 액션 장면을 몇 번이고 똑같이 재생시켰던 것처럼, 이 장면에 돈을 많이 들인 만큼 기어이 뽕을 뽑겠다는 듯 덤비곤 했던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자세가 좀 후져보였기 때문이다.[각주:1] 대신에 캡틴 아메리카에게 수염을 덕지덕지 붙여 이리 툭, 틸다 스윈튼에게 두꺼운 안경을 끼워서 저리 툭 던져놓고 그들을 열차의 부품으로 활용하는 이 영화는 굳이 자기가 가진걸 자랑하려 오바해서 시선을 흐트리는 일이 없다. 엄청난 힘을 레일위에만 집중하는 열차처럼, 묵묵하지만 무서운 집중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뿐이다.






영화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해 본다면, 이 영화는 인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냄과 동시에 어둡기 이를데 없는 비관을 모두 담고 있다. 시작은 시스템의 가장 바닥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이 시스템에 의해 어떻게 핍박을 받게 되는가를 말하고 있지만, 그 핍박을 이겨내고 올라선 시스템의 정상에 어떤 고독과 괴로움이 있는가를 역시나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따지고 보면 엔진실의 윌포드나 꼬리칸의 사람들이나 열차안에 갇혀 지내는 신세이기는 마찬가지다. 열차가 없었다면 윌포드는 물론이고 꼬리칸의 사람들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며, 결론적으로 이들의 생존에 있어 가장 큰 변수는 열차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 이다. 심지어 '무임승차'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꼬리칸의 사람들은 이 생존기계에 어떤 긍정적인 기여도 하지 못한채 그 혜택만을 보고 있는것과 다를바가 없으며, 윌포드가 내려주는 단백질 블럭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지금 만큼의 인간성도 유지하지 못한채로 서로 물고 뜯다가 사라져 갔을것임에 분명하다. 엔진실의 '독재자' 윌포드는 이 모든 밸런스를 혼자서 맞추어가며 열차를 움직이게 했던거다. 과연 윌포드는 이 영화의 끝판 마왕인걸까? 


그럼에도 1인자의 괴로움을 감내해 내야했던 윌포드에게 무조건 적인 애정만을 보낼 수 없는건, 애초의 완벽했던 열차가 점점 그 수명을 다 해 가는것 처럼 마지막 인류에게 생존 열차를 제공했던 윌포드 역시나 점점 혁파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윌포드가 변해서 그렇다기 보다 상황이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것 같다. 혹독하기 이를데 없는 환경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를 제공 받았을 당시라면 누구라도 윌포드에가 감사하고 찬양을 보냈을 것이나, 자신들에 대한 핍박과 희생을 전제로 해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시켜 나가는 윌포드와 앞칸 사람들의 맥락을 눈치챈 뒤라면 언제까지나 그저 고마워 할 수는 없는것 아니겠는가. 엄밀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성자와도 같이 인류를 돌보려고 갖은 노력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담보해 줄 보호막으로써 인류가 필요했던 존재가 윌포드였기에 윌포드의 노력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윌포드를 신으로 떠 받들 필요는 없는거다. 인류의 생존은 윌포드의 노력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효과였고, 그렇기에 윌포드를 포함해 앞 칸의 인류들에 비해 꼬리칸의 인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윌포드 이후의 열차는 (곧,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다. 빙하기에서 도망쳐 나와 서로에게 생존을 위한 빚을 져가며 달려나갔던 시대가 윌포드의 시대였다면, 이후엔 어떤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윌포드의 방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밸런스를 맞출 것이며 인류를 절멸의 위기에서 구해낼 것인가. 윌포드라는 머리를 한칼에 쳐 내고 자신이 열차의 머리가 될까? '윌포드 와는 다를꺼야, 윌포드 와는' 이라고 자기 암시를 하면서. 그게 아니면, 불안하기 이를데 없는 희망과도 같은 정보를 가지고 이 모순되기 이를데 없는 지옥에서 벗어나게 될까?  부당한 희생이 강요 되는 시스템을, 그러나 익숙하고 미지의 세계에 비하면 안락하기 까지 한 열차에서의 삶에서 냉혹한 바깥 세상으로.  꼬리칸에서 부터 엔진실까지 거슬러 올라간 청년은 엔진실의 마스터키를 쥐고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자신의 선임자가 그랬을 것처럼. 이 영화가 무한한 애정과 지극한 비관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한 이유를 반복하자면, 바로 이 선택의 순간에 악인 윌포드의 고민에 대한 연민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 후임자 역시나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게 될 아주 농후한 확률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곰'이라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곰은 열차에서 벗어나는 순간 모두 죽게 될거라는 윌포드의 끊임없는 암시와 'x발 조x 그냥 문일 뿐'이라는 남궁 민수의 희망에 대한 공통의 증거가 되어주는 것이기에. 누구도 틀리지 않았으며 누구도 완벽하지 못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이 미숙한 인류는 또 어떤 생존 기계를 만들어 나가게 될것인가. 그 기계는 과연 윌포드의 열차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효과적일까? 아니면 심지어 더 못하게 될까.




                                                                 

                                                    <난 했으니까, 자 이제 니가 해봐>






















#1. '메이슨 총리'의 억양은 틸다 스윈튼이 스스로 준비한 요소라고 하던데, 

    신기하게 영화를 보기 전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다가 영화에서 접하자 마자 

    '어, 저 여자는 대처?'라는 느낌을 받았다.

     

#2. '유치원 칸' 장면은 어딘가 박찬욱스러운데가 있었다.

      뭐, 좋았다는 얘기다.

     

#3. '그레이', 댁은 뉘시오?   -.- b


#4. 양갱의 재발견. 

     해외에서 이 영화와 관련된 행사가 개최된다면 간식으로 양갱을 내놓는것도 좋을 듯.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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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난 아직까지도 왜 정우성이 그토록 오랫동안 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말타고 총질을 해야 했던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길어도 너무 길었단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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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배우 정웅인의 인터뷰 기사를 본 일이 있다. 그 중에 강우석 감독이 전설의 주먹에 정웅인을 캐스팅하면서 '사람들이 너를 많이 이용해 먹더라'라는 말을 했다는 부분이 인상에 남았다. 풀어 말하자면 정웅인이라는 배우의 존재를 알린 TV시트콤 '세 친구'에서의 코믹한 캐릭터를 이용하려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소리. 물론 그 과정에서 익숙하고 잘 하는 코믹한 캐릭터를 써먹으려는 배우의 시도가 있었을 수도 있으나 강우석 감독은 정웅인이라는 배우가 가진 잠재력이 코믹한 배우로만 한정되는것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정웅인은 그 영화에서의 역할을 바탕으로 지금 히트를 치고 있는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빼어난 악역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정웅인에게 코믹한 캐릭터가 일종의 굴레가 되어 왔다면, 그에 못지 않게 설경구라는 배우도 일종의 껍질에 갇힌듯한 역할을 많이 맡아 왔다. 광기어린 집착을 보이는 마초맨에다 대부분은 형사거나 검사 등등 부조리에 맞서는 역할을 말이다. 의례 강철중류의 캐릭터를 맡아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박하사탕의 철길 장면을 연상케 하는 감정 폭발이 그가 출연하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이어져 왔다.[각주:1] 개인적으로는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에서의 센세이션을 바탕에 둔 배우 설경구에 대한 기대는 여지껏 충족되었던 기억이 없다. 


 이 영화의 컨셉은 설경구라는 배우의 활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형사고, 역시나 젠틀하거나 깔끔한 이미지는 아니다. 열혈 마초맨이라기엔 노회한 능구렁이의 분위기가 더 강하지만, 나쁜놈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예의 그 감정 폭발이 일어날 법도 한 상황에서도 이 영화에선 박하사탕의 영호가 소환되지 않는다. 적지 않은 작품을 통해 수많은 감독들이 활용해 왔던 바로 그 설경구의 전매특허 말이다. 마찬가지로 범죄인에 대한 추적을 촘촘한 cctv 시스템을 바탕으로한 감시로 수행하고 있음에도 그에대한 죄책감이나 회의에 눈길을 주지 않으며, 범죄 집단내의 배신과 갈등을 때깔나는 누와르 화면으로 비장미 돋게 꾸며줄 생각같은것도 없어 보이고, 심지어 청춘 남녀가 등장하는데 연애 비슷한 것도 안한다. 단지 경찰들은 감시하고 쫒고, 범죄자들은 피하고 도망간다. 


얼마나 많은 한국 영화들이 양념치는데 집중하다 본재료도 홀랑 말아먹고 '한국형 OOO'라며 자기 위안을 일삼았던가. 심지어는 로맨틱 코미디물에서도 난데없이 주인공을 죽이네 살리네 하며 눈물을 뽑아내는게 유행을 했을 지경이니;;; 물론 역사에 남을 걸작을 남기고 싶은 시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부분이 그러다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간 실패작들로 남았다. 아마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고비 고비마다 만나는 이 영화의 집중도와 비례해 '어, 이 대목에선 한번쯤 틀어줘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들게 될지 모르겠다. '어, 이 대목에선 빅브라더 시대에 대한 사회고발 메세지가 등장해야 하는데?' '어, 이 대목에선 상처받은 늑대의 눈빛을 팍팍 쏴줘야 하는데? 정우성은 뒀다가 뭐에 쓰려고?' '어, 이 대목에선 츤츤 돋는 연애 스토리가 나올 법도 한데? 연애도 안시킬 꺼면 아이돌은 왜뽑은거임?' 물론 맞딱드린 사건에 대한 감정의 갈무리조차도 외면하는건 아니다. 다만 그 대목은 최소한으로 제한되어 있고 이내 쫓고 쫓기는 게임에 다시 뛰어 든다.


심지어 비슷한 장르물의 또 다른 전매특허인 반전 조차도 이 영화는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에 두시간여의 러닝타임을 꽉꽉 채우고 있는건 쫒고 쫒기는 과정의 긴박감이 전부. 그러나 그 과정역시나 전통적인 형사물 내의 몸과 몸이 부딪치는 액션 활극의 장에서 펼쳐진다기 보다, 각종 하이테크 장비들이 활용되는 첩보물에 가깝다. 반복하지만 대놓고 첩보물이었던 작품들이 뭔가 비장미 돋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긴장감과 팀플레이에서 오는 쾌감을 놓쳤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서울 시내의 아주 제한적인 범위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형사물이 그 미덕을 잘 실행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팀플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능력치도 엇비슷하고 특색있게 배분되어 주인공의 폭주로 팀플이 깨지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으니 참 주도면밀하다 할 수 밖에... 


걸작이기를 포기한 선택과 집중은 이만한 수작을 우리들 앞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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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와중에 설경구의 강철중을 가장 많이 뽑아먹은 사람이 강우석 감독이란건 정웅인의 경우를 놓고 봤을 때 참 아이러니한 상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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