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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도 넘은 ‘외국인 혐오증’은
우리 사회 불안정·불평등의 징후
다양성 인정만으론 해결 안 돼

최근 한국 사회 내 ‘외국인 혐오증’이 도를 넘고 있다. 각종 ‘다문화 담론’이 매체를 뒤덮고, 인종적 차이에 대한 관용이 짐짓 점잖은 사람들의 윤리적 자세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표면상 외국인 범죄의 증가라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대한 대응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띠고 있지만 내면은 훨씬 복잡하다.

필자가 보기에 외국인 혐오증은 세 가지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우선, 현대사적 체험에 각인된 ‘경계 짓기’와 ‘타자 만들기’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나/타자, 우리/적을 나누어 전자에 ‘선’을 배치하고 후자에 ‘악’을 배치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한민족’ 고유의 특성이라기보다 일제 식민지, 미군정, 전쟁, 분단, 군사독재 체제 등과 연관된다. 때로는 외세에 대한 저항을 이유로, 때로는 반공국가 건설과 국가발전 우선이란 명목 아래, 때로는 민주화를 위한 선결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계급적, 민족적, 성적 편가르기를 자행해왔다.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많은 ‘타자들’을 생산해왔으며, 이들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과 편견, 배제와 차별,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행위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수사 아래 정당화돼왔다.

둘째, 인종차별주의와 위계적 권력구조에 대한 급진적이며 비판적인 질문이 삭제된 ‘다문화주의’의 문제이다. 1990년대부터 대한민국 사회는 ‘다문화 현실’에 대한 아무런 인식과 준비 없이 단순히 경제적·인구학적 필요에 의해 수많은 외국인들을 초청해왔다. 단기체류 노동자에 대해서는 배척과 배제주의에 기반하고, 가부장 가족과 민족 혈통을 이어나갈 ‘자식’을 낳는 결혼이주여성들에 대해서는 ‘한민족’ 동화주의에 기반한 정책을 행사해왔다. 이에 대해 이미 많은 국내 학자들은 ‘다문화’ 없는 ‘다문화주의,’ ‘다문화주의’ 없는 ‘다문화정책’을 비판해왔다. 자문화에 대한 성찰, 타문화에 대한 배려와 인정, 융합의 자세를 결여한 다문화주의는 내국인/외국인을 가르고 이주민들 내부의 위계질서 생산을 통해 체류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국가의 관리체제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수사 아래 인종차별주의를 영속화하고 제도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외국인 혐오증은 경제정의와 분배질서가 무너진 ‘현재’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의 정도를 반영한다. 통상 사회적 불안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을 때 기존의 사회적 가치나 질서를 위협한다고 간주되는 조건이나 사람·집단을 집중적으로 겨냥하여 불안의 원인을 투사하는 경향이 생긴다. 극화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할 희생양이 필요해지는데 이의 표적이 되기 쉬운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일 경우가 많다. 이들은 특정한 부류로 정형화되어 죄와 악덕, 무질서, 범죄의 원흉으로 지목된다. 문제는 이로 인해 한국 사회불안의 근본 원인인 양극화, 상대적 빈곤 등의 문제는 가려지고, 경제적 기회를 박탈했다고 간주되는 또다른 사회적 약자인 이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와 배제, 차별과 폭력이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외국인 혐오증은 불안정하고 불공정하며 불평등한 우리 사회의 현재적 징후이다. 따라서 단순히 문화적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전제되어 있는 인종적 편견과 증오,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외국인 혐오증과 혐오범죄는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 이제 혐오의 원인을 안으로 돌려서 ‘우리’ 안에 내재한 수많은 경계들을 들여다보고 이것이 기반한 역사적, 물적 토대를 해체하는 일부터 빨리 시작하자.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07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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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KIA 타이거즈 이종범입니다. 이젠 제 이름 뒤에 '선수'라는 말을 붙이지 못하게 됐음을 알리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동안 정말 분에 넘치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팬과 선.후배들, 그리고 구단 관계자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갑작스런 은퇴 선언으로 많이들 놀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많이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여러분 앞에 분명히 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제 은퇴 결정은 결코 갑작스럽거나 충동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구단에서 은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지난 2008시즌이 끝난 뒤였습니다. 이후 하루도 '은퇴'라는 단어를 잊고 산 적이 없습니다. 

그때부터 제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팀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옷을 벗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리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대주자나 대수비로라도 타이거즈가 이기는 데 필요로 한다면 끝까지 뛰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수비에 구멍이 나면 내야수로도 다시 뛰었던 이유입니다. 
제 은퇴 조건은 그것 뿐이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은퇴를 결심하게 된 것 또한 그 때문이었습니다. 팀에서 제가 더 이상 할 몫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고, 이전에 마음 먹었던 것처럼 은퇴를 택하게 된 것입니다. 

초라하게 은퇴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마흔이 넘어서도 후배들과 경쟁할 수 있었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저의 전성기를 만들어줬다면 최근 몇 년 간의 생존은 독한 각오와 치열한 노력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불태웠던 삶이었기에 조금의 후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타이거즈에 들어오고 싶어서 야구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해태 유니폼을 입게 됐을 땐 정말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꿈꿔왔던대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은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 은퇴는 어디까지나 저의 선택이었습니다. 괜한 오해로 다른 사람들이 상처 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분들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기에 이 자리에도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타이거즈 선수로 너무도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앞으로의 시간은 그 사랑을 어떻게 돌려드려야 할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데 쓰겠습니다. 

선수 생활 막바지에 제게 가장 큰 힘이 됐던 건 우리 주위의 아버지들이었습니다. 나이 먹고도 계속 뛰고 있는 저를 보며 힘이 나신 다며 손을 꼬옥 쥐어주시던 분들. 그분들에게 힘을 얻었고, 또 그분들에게 희망을 드리고 싶어 더 열심히 했습니다. 

이 시대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전 이제 선수로서는 은퇴하지만 또 다른 도전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 합니다. 두 번째 인생에서도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저 혼자의 힘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들의 기운을 모아 꼭 좋은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코치 연수는 지금의 저에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니치 시절 일본 프로야구에서 리그 우승도 경험해 봤고 2군에서 힘겹게 생활하고 있는 선수들과 함께 뛰기도 했습니다. 선진 야구에 대한 부분은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야구는 끊임없이 공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늘 같은 곳에만 머물러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인생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던 적이 많았습니다. 보다 넓은 세상을 보며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보려 합니다. 좋은 지도자가 되려면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다듬어서 좋은 사람,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공부를 하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여러분을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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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심상정-유시민 '세트'의 의미…리버럴에 다시 속아넘어가나?

국내 정치에서는 내년과 내후년에 상당한 변화들이 예상됩니다. 2008년 이후에 권력을 다시 잡은 극우들은, 내년의 총선과 대선 이후에 그 권력을 지속적으로 장악할 가능성은 계속 얕아지고 있습니다. 즉, 극우들이 안정적인 장기집권 체계의 정립에 실패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극우 안정적 장기집권 실패 가능성 높아져

최근의 박원순씨 당선도, 폭발적인 '안풍'도, 계속 내려가기만 하는 아키히로(明博)와 '공주님'의 지지율도 바로 이 실패의 징후에 해당됩니다. 2~3년전 만해도 40% 가까운 지지율을 배경으로 해서 '공주님'은 이미 "등극 준비 중의 차기 나라님"으로 인식되곤 했습니다. 지지율이 안철수보다 훨씬 못한 23% 정도 되는 지금은? 그저 유효기간이 언제 만료될는지 모를 여러 보수 정객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조금 더 긴 안목으로 본다면 약 7~8년 전에 신지호 같은 전향자 출신의 보수 정치꾼들만 해도 '뉴라이트'로 불러졌으며 좌파가 따라잡기 어려운 우파의 자유주의적 대수술을 집도할 "참신한 인물군"으로 생각되어졌습니다. 지금 신지호는 과연 무엇인가요? 속된 말로 이미 '맛이 간' 극우적 선량 중의 한 명일 뿐이죠. 그보고 누가 '뉴'라는 접두사를 붙이겠습니까? 이미 '올드 라이트'의 모든 추태들을 다 능가하신 분인데 말입니다. 

웬만한 세탁기나 텔레비전보다 국내의 극우 정객은 훨씬 더 빨리 고장나고 맙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격'만의 문제 아니고 구조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극소수 수출 위주의 재벌들과 부동산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정확하게 맞추어진 한국형 극우정치는 기본적으로 변신을 거부합니다.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의 중점적 착취와 중소기업에 대한 착취, 그리고 땅 투기를 기반으로 삼는 현 (주)대한민국의 장사 방식 그 자체가 변화를 거부하듯이 말씀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만큼 민심 얻기에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예컨대 '경제'로 뽑힌 아키히로 전하께서는, 실제로 경제로 패배를 당하고 말았지요. 토건국가의 관례대로 4대강 죽이기 등의 방식으로 계속 (불필요하고 대단히 유해한) 대형 공사만 지원했다가는 2008년 세계적 경제 위기의 영향을 크게 받아 2009년 성장에 거의 실패했으며, 그 후로는 대(對)중국 수출 등으로 가까스로 회복해도 내수기반 확대에 실패해 지금 성장세의 지속적 둔화를 어떻게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년 성장률 전망은 2% 정도인데, 재분배 장치가 약하고 영세 자영업자들의 비중이 높은 한국 경제의 특성상 이는 고용난과 내수 침체, 영세업자들의 줄도산의 지속 등을 의미합니다. 역시 건설사 사장은 변신을 잘 못합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일용직 노가다 노동자들을 고되게 일시키는 데에 귀신이다 하더라도 나라 규모의 이 커다란 엉터리 건설사가 더이상 영원히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것을 인제 다들 어느 정도 눈치챘으니까 2008년 이후의 극우 주도 체계가 단명으로 끝날 것 같다고 볼 여지는 많습니다.

진보를 사칭하는 리버럴들

그러나 현 정국 주도 구조가 단명으로 끝난다 해도 과연 (주)대한민국의 피고용자들의 다수를 이루는 하급 노동자들까지 잘 사는 세상은 될까요? 과연 그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표방하는 극소수의 진짜 진보세력들은 그 몫을 크게 확창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 노력에 달려 있는 부분들은 많지만, 극우들이 패배를 향해 달려간다고 해서 민중의 대변자들이 권력을 잡을 일은 자동적으로 가능해지지 않습니다. 그 둘 사이에 한 가지 벽이 있는데, 이는 바로 '진보'를 사칭하고 있는 각종의 리버럴들입니다.

물론 이미 노무현의 시절에 비정규직을 마구 양산하고 지금 커다란 재앙으로 돌아온 한미 FTA를 선구적으로(?) 계획, 추진한 그들에 대해, 민중은 벌써 크게 분노하고 실망한 적은 있었습니다. 지금의 극우집권도 그 실망의 한 가지 결과물이기도 하죠.

그런데 '개혁' 사기로 정치적 자본을 축적한 사람들은 대개 머리가 비상히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있지도 않은 물건, 즉 (자유주의적) '개혁'을 팔자면 정치적 상술 9단 정도 돼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이번에 저들은 이미 우리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판매 전략(?)들을 준비한 것입니다:

1) 섞어서 "세트"로 팔기

민중을 없는 살림에 살인적 학비 등을 내야 하는 비정규직으로 만들어냈던 노무현 정부의 장관을 이미 해본 유시민씨는, 더이상 정치적 장터에서 낱개로 판매되지 않고 노회찬, 심상정 등 친민중적 경력이 있는 우파 사민주의자들과 한 세트로 팔립니다.

낱개 판매면 이미 신선도가 별로 좋지도 않은 이 물건을 사주실 분들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이번에 한진중공업 문제로 장기 단식까지 하신 두 분들과 세트가 되어서 팔린다면? 글쎄, 어쩌면 이러한 세트 판매가 성공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듯한 한 리버럴은, 다시 한번 "경력 세탁"되고 '참신한 친서민 정치인'으로 돌아올 셈이죠.

2) 과거의 리콜 사태에 대한 기억 지우기

실제 2006년 이후에 노무현 정권의 인기는, "놈현스럽다"와 같은 단어들이 등장할 정도로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임기 말기의 노무현과 유시민 등 그 가신들은 진보가 아닌 한미FTA식의 가장 얄팍한 신자유주의의 상징이었지요.

그러나 특히 노무현의 자살 사태가 계기가 되어 그 부정적 기억들은 점차 노무현의 계승자들에 의해서 세탁되기 시작했습니다. 문재인 등의 저서에서는 노무현은 거의 '이상적 인격자'로 보이고, 그 정권 시절은 '실낙원'처럼 묘사됩니다. 아키히로 정권의 '신악'의 추악함에 압도를 당한 수많은 독자들에게 노무현 당시의 '구악'에 대한 기억들을 또 지우기가 쉬우니까 이 판매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둘 위험성은 있습니다. 

3) 재포장과 새로운 광고 모델

물건은 그대로겠지만, 간판은 참신한 쪽으로 바꾸고, 그 간판 위주로 포장이 다시 디자인된 셈입니다. 이러한 전략의 대표적 사례는 이번 박원순씨의 당선이죠. 포스코, 풀무원 등 사외이사 출신이며 코오롱 등 재벌의 후원을 따는 데에 수완이 비상한 "재벌가의 친구" 박원순이고, 부하들에게는 거의 '독재자'로 인식되는 스타일의 리더 박원순이지만, 대다수의 중도적 유권자들에게는 그는 '참신한 얼굴'이자 거의 '진보'로 다가왔잖아요.

이유는? 정부나 재벌, 교회, 정계 등등은 그저 '도둑'으로 통하는, 철저하게 냉소적인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시민사회'에 대한 시선은 비교적으로 덜 싸늘하기 때문이죠. 그람시의 말대로, 시민 사회의 '권위'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무형의 방어력 중의 하나입니다. 앞으로는 박원순씨와 비슷한 케이스들이 꽤 있을 것 같고, '개혁' 사기꾼 진영은 그렇게 해서 재정비될 듯합니다. 

사기는 영원하지 못하지만, 내년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박원순 류의 "참신하고 깨끗한 리버럴"들에게 속아 넘어갈 게 뻔합니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덜 속게, 진짜 진보는 피나는 노력을 해서 이 사회의 계급적 현실에 대해 소리를 크게 내야 하겠습니다.

2011년 12월 09일 (금) 08:14:23 박노자 / 오슬로대  webmaster@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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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내 자신이 합리적 보수주의자라 생각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도 시민운동을 해왔다는 박원순을 믿을 수 없어 “차라리 얼굴마담이 낫겠지”하는 생각으로 나경원 후보에게 투표를 하였다. 내가 왜 이 글의 서두에서 이런 위험한 말을 하느냐 하면 이제부터 쓰려는 내용에 대해 그냥 내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부탁드리기 위함이다.

나는 한미 FTA 비준과 관련하여, 그것이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는 불평등 조약일 가능성이 있고, 특히 사법부의 재판관할권을 빼앗는 점에서 사법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이며, 이에 대해 국민으로부터 사법권을 위임받아 이 조약을 포함한 법률의 최종적인 해석권한을 가지고 있는 우리 법원에서 이제라도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려고 한다.

한미 FTA와 관련해서 나의 입장은 처음에는 찬성이었다. 그러다가 최근 논란이 정치, 사회적으로 계속되면서 정작 내가 한미 FTA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토론자료나 요약자료, 토론회를 보며 공부…

내가 한미 FTA가 불평등 조약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품게 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나라는 성문법 국가이고, 한미FTA가 비준되어 발효되면 그 협정 자체가 법률과 동등한 효력이 있는 조약으로서 규범적 효력을 갖추게 된다. 그러면 신법우선의 원칙에 따라 1500페이지에 달하는 한미FTA에 배치되는 모든 법률과 하위 규범은 달리 개정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무효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불문법 국가로서 한미FTA자체가 법규범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행법안을 만들어서 이를 의회에서 통과시키면 그 이행법률만이 규범적 효력을 갖게 된다고 한다. 한미 FTA로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법률상 장벽은 제거되었는데, 미국에 있는 모든 법률상 장벽은 존속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불평등 조약이 아니고 무엇인가?

둘째, 네거티브 방식에 의한 개방이다. 즉 한미 FTA는 개방을 유예하거나 제한하는 분야만 협정에서 적시를 하고 나머지는 모두 완전히 개방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앞으로 예측하지 못하는 새로운 서비스 시장이 열리게 될 경우, 우리나라가 이를 보호하고 시장의 이익을 지킬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EU와의 FTA는 포지티브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을 때도 포지티브 방식에 의한 개방을 택했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역진방지조항이다. 역진방지조항은 우리나라정부가 그때그때 경제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는 시장보호정책을 취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는 족쇄이고, 우리나라 시장경제를 낚시바늘에 꿰인 물고기 신세로 만드는 조항이다.

넷째, 상대 국가의 정책이나 규정에 의해 직접적으로 입게되는 손해가 아니더라고 이를 통해 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되면 보상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이른바 ISD조항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우리나라의 사법주권을 빼앗는 조항이다. 왜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분쟁에 대해 국내 법원이 아닌 제 3기관에 권리구제를 맡겨야 하는가? 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이 있는 조약의 해석에 관하여 법률의 최종적인 해석권한이 있는 법원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법권을 포기해야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줄 것은 다 내어주고 받을 것은 하나도 못 받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협상이 맺어지게 됐을까?

나는 국민적 논란이 되고 있는 한미 FTA와 ISD조항에 대해 법률의 최종적인 해석 권한을 가진 사법부가 어떠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원이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대법원장님께 법원행정처내 한미 FTA재협상을 위한 TFT구성을 청원하는 방법이 어떨까한다. 연구과제는 한미 FTA에 어떠한 불공정 요소는 없는지, 있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바로잡아야 하는지, ISD조항은 과연 타당한 것인지 등이 될 것이다. 

[제안] 만일 이러한 저의 제안에 공감하는 판사님들이 계신다면, 이글에 대한 댓글로 저의 제안에 동의한다는 취지를 기재해주시기 바랍니다. 12월 한달동안 동의하는 판사님이 100명을 넘어선다면, 저는 정식으로 법원행정처내 한미 FTA재협상을 위한 TFT를 구성해달라는 청원문을 만들어 대법원장님을 만나뵙고 청원을 올리려고 합니다.


 
보수성향 부장판사 “한미FTA 불평등조약, 사법부 나서야”… 판사 100여명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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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사상, 2011.11. 

출판은 왜 사양산업이 되었는가(변정수)


전자책에 대한 오해와 진실

몇 해 전부터 ‘종이책’의 종말을 점치는 담론들이 꾸준히 확산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지하철을 타 보면, 책을 읽는 사람은커녕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다. 대신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앞으로도 점점 늘어날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도 이런 시대적 추세에 부응하여, 2015년까지 ‘서책형 교과서’를 ‘디지털 교과서’로 대체하여 학교 현장의 풍경도 이렇게 만들겠다고 한다. 종이책은 정말 머지않은 장래에 자취를 감추든가 골동품으로나 여겨질 것인가.

이 질문에, 막연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제대로 대답을 내놓으려면 몇 가지 검토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격’이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질문해 보자. 가령 종이책으로 구입할 때 한 권의 가격이 1만 원 하는 책이 있다면, 같은 내용을 전자 매체에 내려받기만 할 때 얼마쯤의 가격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가. 실제로 이런 조사를 정밀하게 해 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2천 원에서 3천 원쯤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아마도 가장 많을 것이고 5천 원 이상을 지불해도 상관없다고 대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책값에 대한 이런 대중적 ‘감각’에는 커다란 오해가 한 가지 개입되어 있다. 좀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질문을 조금만 바꿔보자. 한 권에 1만 원짜리 종이책이 있다면, 이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종이를 사서 인쇄를 하고 책을 묶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쯤일 거라고 생각하시는가. 다시 말해 그런 물리적 과정을 없애버린다면 지불하지 않아도 될 비용이 얼마쯤일까. 놀라지 마시라. 책의 규격과 재질, 인쇄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에 싸잡아 말하기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본문에 색도 인쇄를 하지 않는 일반 단행본의 경우 아무리 많이 잡아도 2¨3천 원을 넘지 않는 게 보통이다. 의심스럽다면 비슷한 규격의 (별다른 디자인이 없는) 평범한 공책 한 권의 가격이 얼마쯤일지를 어림해 보시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도대체 책갑이 왜 그리 비싼 건지, 혹시 엄청난 폭리나 가격 거품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시는 분도 있을 게다. 혹시 ‘책’이 아니라 ‘공책’의 가격이라면 이런 의심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책을 사는 것은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몇 십 만원짜리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면서 시디값이 몇 푼이나 한다고 이리 비싼 값을 매기느냐는 식으로 셈하는 사람이 어리석다면, 책값이라고 하면 으레 종이값과 인쇄비부터 따지고 드는 발상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같은 내용을 종이에 인쇄하지 않고 전자 매체로 전송했을 때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이 ‘종이를 사서 인쇄를 하고 책으로 묶는’ 비용뿐이라면(좀더 엄밀히 따지자면 ‘책을 팔기 위해 옮기고 보관하는’ 비용도 포함해야 하지만, 전자책의 전송 및 보안 시스템의 개발과 유지 관리에도 적잖은 비용이 필요한 만큼 일단 그 부분은 무시하자), 1만 원짜리 종이책을 전자책 형태로 공급할 때 적정 가격은 대략 7천 원선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바람직한가의 여부를 떠나서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 속에서 문화적으로 형성된 가격에 대한 ‘감각’이 쉽게 변하기 어렵다면, 적정 가격이 2¨2천 원쯤이라고 생각되는 상품의 정가가 7천 원으로 매겨져 있을 때 선뜻 지갑을 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도 이미 ‘종이책’ 시장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애써 만들어낸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아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생산 원가에도 못 미치는’ 터무니없는 헐값을 내건 무분별한 덤핑이 더욱 판을 칠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고, 출판 산업의 재생산 기반은 와해될 것이다.

물론 음반 시장은 몰락했지만 대중음악 산업 자체는 음원 시장이라는 대체 시장을 성장시키켠서 살아남았던 사례를 근거로, 이런 전망이 너무 비관적이라는 반론을 펴는 분들도 없지는 않을 게다. 쉽게 말해 가격이 떨어지는 만큼 수요가 늘 수만 있다면, 7천 원짜리가 2천 부 팔리나 2천 원짜리가 7천 부 팔리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책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초기 비용 가운데 실제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주어진 내용을 좀더 읽기 편하게 가공하여 일정한 공간(종이책이라면 지면, 전자책이라면 수신 장치가 요구하는 규격의 프레임)에 보기 좋게 배열하는’ 비용이고 이 과정은 일단 완결되면 판매량의 증가에 따라 추가 비용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딴은 일리가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바로 이 점 때문에 책은 ‘생산 원가’를 기계적으로 셈할 수가 없다. 판매량이 증가하는 데 반비례하여 총생산비에서 이러한 초기 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들면서, 한 권당 생산 원가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해 판매가 부진하면 결과적으로 ‘생산 원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혹시 착각하시는 분이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이것은 일반 공산품 제조업에서 생산 규모가 커질수록 원가가 낮아진다는 원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대량 생산이 ‘규모의 효율성’을 확보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산 규모와 무관하게 초기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의 경직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것은 책뿐 아니라 모든 문화상품의 본질적 속성이다. 가령 영화의 예를 들자면, 관객이 1만 명일지 100만 명일지는 개봉을 해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와 무관하게 개봉 이전에 이미 제작비의 대부분을 집행한 상태인 것처럼, ‘모험성’ 또는 ‘위험성’이 그만큼 크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속성 때문에 이미 발생한 손해를 최대한 만회하려다 보면 ‘겉으로 남고 안으로 밑지는’ 덤핑의 유혹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아무려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음원 시장이 음반 시장을 대체한 것처럼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낙관적인 반론은 정당한가를 따져보자. 대중음악과 책은 수용 양상이 상당히 다르다. 사람마다 취향이 있게 마련이라 단지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음악이나 소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주 싫어하는 장르만 아닌 한 크게 부담되는 가격도 아니라면 구매를 결정하는 데 상대적으로 그리 큰 고민이 필요하지는 않다. 게다가 마니아가 아닌 이상 음악을 들을 때는 음악에만 집중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완전히 무료라면 모를까 자신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라면 구매를 결정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글을 읽는 것은 따로 시간을 내서 어느 정도 집중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 음악은 한 번 내려받으면 좀 지겹다 싶어질 때까지는 몇 번이고 내킬 때마다 되풀이해서 듣게 마련이지만, 이왕 내려받은 책이니 알차게 본전을 뽑겠다고 같은 내용의 책을 서너 번 이상 읽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춘다고 해서 그에 비례하는 만큼 구매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모든 책이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책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수용 양상도 천차만별이라, 대중음악과 유사한 양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종류의 책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가벼운 터치의 로맨스 소설, 무협지, 야설 따위처럼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자투리 시간에 심심풀이삼아 일별해도 크게 부담이 없는 내용들이 대표적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런 책들이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려는 건 전혀 아니다. 책에는 다양한 효용이 있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그런 종류의 책들을 탐닉하는 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뉴스부터 가십까지 무료로 뿌려지는 텍스트들도 널려 있고, 게다가 동영상이나 게임 같은 훨씬 자극적인 멀티미디어 기반의 다양한 콘텐츠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얼마나 경쟁력을 가질지가 미지수라는 점뿐이다. 예컨대, 가격이 비슷하다면 야동을 두고 굳이 야설을 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정보통신 기술이 나날이 진보하는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다양한 형태의 전자책이 지금보다 확산될 것은 분명하지만, 산업적 전망은 극히 불투명한 상황인 만큼 지나치게 들뜰 일도 아니고, 위에서 예를 든 협소한 범위의 책들을 제외하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지도 못할 터이니 섣부르게 ‘종이책의 종말’이 시대의 대세이기라도 한 양 떠들 일도 아니다. 정작 더 깊이 고민해야 할 지점은 ‘다가오는(?)-실은 다가오지도 않을 전자책 시대’를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책’ 자체의 위기가 그야말로 ‘종말’로 치닫고 있는 현실이다. 이대로 가면 그리 멀지않는 장래에 한국 출판산업은 처참한 붕괴를 맞을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가 유도하는 착시

책을 다루는 ‘뉴스’들도 다른 ‘뉴스’와 다르지 않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흔한 말로 ‘개가 사람을 무는 건 뉴스가 못 된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뉴스가 된다.’ 게다가 문화 현상을 다루는 뉴스에서라면, 심지어 전혀 뉴스가 안 되는 ‘개가 사람을 문’ 사건조차도 곧잘 ‘사람이 개를 문’ 뉴스거리로 둔갑하기도 한다. 문화 현상에서 ‘객관적인 사실’ 그 자체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3최근 출판 시장의 ‘뉴스’ 가운데 하나는 <<도가니>>라는 책이 잘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팩트’는 이 사실뿐이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이것이 ‘사람이 개를 물었다’는 건지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 건지, 즉 뉴스인지 아닌지조차 아리송하다. 이 사실을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기술하느냐에 따라 그저 흔해빠진 ‘단신’에 머물 수도 있고 ‘출판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어마어마한 뉴스가 될 수도 있다.

두어 해 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현재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드러나는 대중의 욕망을 통해 시대정신의 흐름을 파악해 보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다. 꽤 의미있는 공부가 될 거라고 생각한 과제였는데, 딱 두 학기 동안 시도해 보고는 포기해 버렸다. 학생들의 보고서가 신통치 않아 별다른 교육효과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학생들은 과제가 요구하는 바를 너무나 성실하게 고민해 주었지만, 그 고민의 결과를 살피며 내가 내린 결론은 ‘적어도 베스트셀러 목록을 통해서는 시대정신의 흐름을 읽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유행하는 문화상품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절감했다. 물론 책의 판매를 촉발한 다른 문화상품이 왜 유행하는지까지 시선이 닿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시대정신의 기저를 탐색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미 ‘출판’을 가르치는 과목의 범위를 훌쩍 넘어선 주제인 데다가 굳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필 필요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예컨대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가 지금 잘 팔리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도가니>가 화제 속에 흥행몰이를 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이 소설의 판매는, 특히나 이 작가의 고정독자층이 꽤나 튼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부진했다. 물론 영화 <도가니>의 흥행에서 어떤 시대정신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고 또한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영화비평’이지 ‘출판비평’이 아니다. 고작 ‘영화가 잘 나가면 원작 소설도 덩달아 잘 나가기도 한다’, 즉 문화상품 시장에서 책은 ‘독립변수’가 아니라 다른 장르의 ‘종속변수’가 되었다는 것이 이 시대 ‘매체 수용’의 흐름이라는 정도가 출판비평의 내용일 것이다. 요컨대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 어떻게 공전의 히트를 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건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겠지만, 오로지 그 덕분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성균관 유생의 나날>>을 통해서는 ‘책이 드라마의 파생상품이 되었다’는 사실 외에 어떤 의미있는 통찰도 기대할 수 없겠더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도도한 흐름은 올해 초 ‘주원이의 서재’를 통해 다시 한 번 유감없이 확인되기도 했다.

치졸한 ‘밥그릇 지키기’ 차원의 편협한 페쇄성의 발로가 아니라면 그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갸우뚱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돌려 설명해 보자. 어떤 책이 주제의식에서든 소재의 선택에서든, 논지 전개나 접근 방식에서든, 서술 전략이나 문체적 특성에서든, 그 고유한 속성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면, 우리는 그 사실로부터 얼마든지 ‘이 시대의 대중이 어떤 책을 요구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고, 더 나아가 ‘어떤 책을 만들면 그러한 시대정신에 부응할 수 있을지’를 모색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가령 영화 <도가니>나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흥행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대중이 어떤 영화를 요구하는지, 어떤 드라마를 요구하는지’뿐이다. ‘어떤 책을 요구하는지’라고 질문을 바꿔놓으면 ‘책 자체의 고유한 속성과는 크게 상관없이, 영화나 드라마가 성공했든, 존경할 만한 인물이 돌아가셨다고 뉴스에서 연일 관심을 보였든, 또는 심지어 이미 잘 나가는 책이라고 소문이 날 만큼 났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책’이라고밖에는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그런데 과연 그런 해석들이 이야기하는 이유에서 이 책이 그토록 오래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얼마 전에 이 책과 관련된 우스개를 하나 들었다. 웬 아주머니가 서점에 와서 “요즘 잘 나가는 책이라던데, 제목이 뭐라더라. ‘아시아 청년’인가, 그런 책 있나요?”라고 묻더란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아프리카 청년’으로 잘못 들었던 모양인데, ‘아프리카’는 너무 머니까 좀더 익숙한 ‘아시아’로 한 번 더 왜곡이 얼어난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책을 산 사람들의 절반쯤은 그렇게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샀을 거라고 나는 감히 짐작한다. 무슨 근거로 그런 짐작을 함부로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 책과 비슷한 내용을 비슷한 어조로 서술한 비슷비슷한 책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기에 새로울 게 전혀 없는데도(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책들도 적지 않지만, 대개 오래 가지는 못한다) 지나치게 오래 롱런했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얻었다고 답하겠다.

지난 해, ‘인문서 시장’의 건재를 확인했다는 상찬 속에 엄청난 판매를 기록했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이런 혐의가 발견된다. 우리 사회에 ‘정의’라는 문제가 화두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정치사회적 배경을 들먹이곤 하는 낯설지 않은 분석들이 옳다면, 이 주제를 다룬 동서고금의 수많은 책들이 이 책만큼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판매가 나아진 흔적이 발견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은 조금도 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요란한 상찬 덕에 그토록 오래 많이 팔릴 수 있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지금 한국의 출판 시장에선 ‘좋은 책이 많이 팔리는’ 게 아니라 ‘많이 팔리는 (것으로 알려진) 책이 더 많이 팔린’다. 그래서 적잖은 출판사들이 외형상 매출을 올리기 위한 ‘되사들이기’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베스트셀러 목록이 문화상품 소비의 반문화적인 ‘쏠림’을 부추기는 시장의 왜곡을 야기한다거나 심지어 ‘책 되사들이기’와 같은 파행적 정보 왜곡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더 근본적으로 대중의 심각한 착시를 유도하기도 한다. 보통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상위에 한 달 이상 랭크될 정도라면 수십만 부가 판매된 결과이다. 그리고 온통 무슨 책이 몇 십 만 부가 팔렸다느니 몇 십 쇄를 돌파했다느니 하는 ‘신나는’ 소식들만을 뉴스로 접하는 대중들은 출판산업이 ‘호황’인 줄 안다. 출판사들이 책이 안 팔려 빈사 상태이고 출판 산업 전체가 붕괴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고 실상을 전해도 공연한 ‘엄살’인 줄 안다. 저렇게 잘 팔리는 책도 있고 잘 나가는 출판사도 있는데 ‘무능하고 게으른’ 것들이나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출판사들조차 실은 ‘속 빈 강정’이고, ‘밑빠진 독에 불 붓기’ 식으로 마케팅 비용을 쏟아붓는 실상이나 초쇄 소화도 못하는 ‘수십 권의 실패작’들이 깔려야 ‘한 권의 베스트셀러’가 나올까 말까라는 ‘모험산업’의 계산법을 속속들이 털어놓은들 ‘배부른 투정’쯤으로 치부되는 게 고작이다.  

심지어 출판 종사자들조차 이런 착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루하루 죽겠다고 아우성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박’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한다. 책을 제대로 읽어주고 좋은 책을 알아봐주는 ‘독자’가 사라져가고 있는데도, 어떻게든 책 한 권이라도 더 팔 궁리만 할 뿐 독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늘리려는 더 근본적인 모색은 안 한다.

공공화만이 해답이다

독자가 줄어드는데도 책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은,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낭비’다. 아무리 추상적으로 책의 가치를 역설한들 이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책은 읽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어야만 굳이 세상에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책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그것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무도 미리 알 수가 없다. 뻔하디 뻔한 얘기로 여겨지겠지만, 이것이 출판산업을 붕괴로 치닫게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앞서 책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종이값이나 인쇄비 따위의 물리적인 비용이 아니라, 설령 전자책의 형태로 만들더라도 결코 줄어들 리가 없는 비용이라고 말했지만, 그조차도 그저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지출하는 비용 가운데에서 책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어떻게든 더 팔기 위해’ 들어가는 마케팅 비용이 날로 증가하고 있지만, 그 점을 논외로 하고 ‘책을 만드는 비용’만을 고려하더라도, 책 한 권의 ‘원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순수하게 그 책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제작비’나 ‘편집비’ 따위가 아니라 실은 일종의 ‘보험료’이다. 애써 만들어낸 책이 결과적으로 팔리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매몰 비용’이 팔리는 책에 의해 벌충되지 않으면 출판산업은 지속적인 재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출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듯이, 저자에게 지불되는 ‘저작권 사용료’는 책값의 대략 10퍼센트 가량이다. 즉 1만 원짜리 책이라면 대략 1천 원 가량이 저작자의 몫이다. 단지 이 사실만 놓고 보면 출판사에서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5천 부에 해당하는 저작료가 미리 지불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사실 저작료는 판매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저작물을 복제하고 판매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대가이고, 적어도 계약된 부수의 판매에 대한 위험부담은 저자가 아니라 출판사가 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책이 2천 부밖에 판매되지 않았다면, 1만 원짜리 책 한권에서 저작료 부담은 1천 원이 아니라 2천5백 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설명의 편의를 위해 단순화한 계산법이다. 실제로 출판사에서는 책 한 권 한 권에 이런 계산을 적용하지는 않는다. 일정 기간을 단위로 출간 계획을 잡고 그에 소요되는 비용과 예상되는 판매량 및 위험부담을 전체적으로 계산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일정 규모 이상에 못 미치는 대다수 영세한 규모의 출판사에서는 실제로 이런 장기적인 계산을 펼칠 만한 여유조차 없다는 것이다. 아예 폐업을 하지 않는 이상 책을 만들어야 수익을 기대할 수라도 있으니 ‘도박판’에 판돈 걸듯 위험부담에 대한 별다른 대책도 없이 일단 책을 만들어내고 본다. 그리고 대다수의 대중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그 책을 꼭 필요로 하는(즉 그런 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한 권쯤 사 줄 수도 있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독자들조차 그 책의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채로 사장되는 책들이 부지기수이다. 

독자들을 탓할 수만도 없는 게 1주일 동안 시장에 나오는 책만 해도 어림잡아 수백 종이다. 게다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는 건, 기형적으로 왜곡된 ‘도서정가제’이다. 출간된 지 18개월 미만의 신간에 대해서만 정가판매를 강제하는 까닭에, 정가제에서 풀려난 구간 도서들이 걸핏하면 ‘반값’이나 그에도 못 미치는 터무니없는 헐값으로 할인 매장에 나온다. 하지만 당장의 실용적 요구를 충족하는 학습서 따위가 아니라면 ‘꼭 지금 읽어야 하는 책’이란 사실 별로 없다. 그러니 혹 읽고 싶은 책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길게 잡아도 1년 반만 기다리면 훨씬 싼값에 살 수 있다면, 곧바로 구매하는 것은 ‘바보짓’이나 다름없게 된다. 

여기서부터 악순환이 일어난다. ‘되사들이기’는 물론 눈속임으로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기’라도 해보려는 안간힘이지만, 설령 역부족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해도 정직하게 ‘안 팔리는 책을 창고에 쌓아놓기만 하는 것’보다는 현금 융통에 훨씬 큰 도움을 준다. 중고 시장으로 풀려나오는 책들의 상당량이 실제 독자들이 읽고 되파는 책이 아니라 이렇게 변칙적으로 풀린 책들이라는 것쯤은 이제 출판계에서 비밀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 발생한 손해는 ‘마케팅 비용’이라 여기면 그만이다. 그 와중에 ‘운좋게도’(!) 그간의 매몰 비용을 상쇄할 ‘대박’이라도 터져주면 그래 봤자 ‘원점’이고, 그런 행운조차 만나지 못한다면 그냥 망하는 것이다. 혼자서만 망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아무리 코딱지만 한 구멍가게라도 대한민국에서 순수하게 제 돈만 가지고 사업하는 사람 본 적 있나. 곳곳에 ‘민폐 작렬’이다.

그래서 웃지 못할 역설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금융권 부실을 몰고 온 ‘대마불사’의 신화이다. 그대로 주저앉으면 꼼짝없이 떼이게 될 빚의 규모가 클수록 오히려 더 오래 버티게 마련이니, 터졌다 하면 ‘대형 사고’다. 도대체 누가 ‘출판은 소규모 창업이 유망한 업종’이라고 무책임하게 떠들어대는지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애당초 양심껏 살고 싶고 간도 작은 사람들이 고작 ‘몇 천만 원’ 정도의 (당사자에게는 피눈물 나는 거액이겠지만) ‘푼돈’으로 소박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도, “그러니까 팔릴 만한 책을 잘 골라 만들면 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현장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구상한 책은 틀림없이 크게 성공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수요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하자. 진심으로 조언하건대, 정말 그걸 미리 알 수 있는 예지능력이 있다면 출판사를 차리는 것보다 미아리에 점집을 차리는 편이 성공 가능성이 훨씬 높다. 동어반복이지만,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위험’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험산업’에서 ‘위험’이란, ‘예측’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다. ‘관리’에는 필연적으로 ‘비용’이 수반되게 마련이며, ‘위험도’가 높을수록 그 비용은 커진다. 그리고 그 비용이 현재 출판산업의 규모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졌으며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는 것이 내가 출판사업의 ‘붕괴’라는 극단적인 전망을 도출하는 근거이다.

그러니 출판산업이 붕괴를 피하려면, ‘위험도’를 줄이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아무도 ‘타산이 안 맞아’ 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세상이 그다지 불편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사람이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좋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책이 필요하고 또 누군가는 책을 만들어내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 노력에 상응하는 (충분치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대가가 정당한 방법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거기에는 ‘위험’에 대한 비용도 당연히 포함된다. ‘위험’을 오로지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면 누구인들 위험한 일에 뛰어들려 하겠는가.

세상의 그 어떤 책도 책으로 만들어져 대중 앞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닐지를 단언할 수 없다는 준엄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책이 만들어져야 그런 가치를 인정하든 말든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 위험에 따른 비용을 사회적으로 함께 부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출판산업이 ‘공공화’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은 그 책의 ‘생산 원가’가 얼마이든 그와 무관하게 ‘무료’로 책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의 세금과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공공도서관의 확충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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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거울에 비친 진보의 일그러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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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인 '지역감정'이 아니라 다른지역 사람 
들이 모두 전라도 사람을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수준을 넘어서 일종의 '편집증' 단계에 이른 '질병'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지역 
감정' 이라는 말 대신 '전라도 혐오증' 이라는 단어를 써야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겪은 대로 말하자면 사람들의 전라도 혐오감은 '전라도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린 시절'에서부터 형성된다. 주로 서울에 살거나
살다온 가족과 친지들에게서 듣는 좋지 못한 이야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무개 집주인이 전세금을 띠묵었는데 전라도 사람이라 카더만' 이라든가, 
'아무개네 가게 경리직원이 돈을 빼돌리다가 들켰는데 전라도 어디 여자라 카더라' 
는 식의 구체적인 '피해사례'가 화재로 오르면, 사실 여부나 그런 못된 짓을 한 
'바로 그 사람'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만 부각된다. 

그래도 무슨 구체적인 사건을 근거로 말하면 좀 나은 편이다. 너도 나도 맞장구를 
치다 보면 '전라도 사람은 배신을 잘하기 때문에 아무리 충성 하는 것처럼 보여도 
조심해야 한다' 거나 '군부대 철조망이 누구 때문에 생겼나' 하느 따위의 일반적 
이고 추상적인 주의 주장까지 거침없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리기 때문에 경상도에는 아무리 입이 심심 
해도 해태껌은 사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곧바로 출발하는 광주고속 버스에 빈 
자리가 있는데도 30분씩 기다렸다가 (광주고속이 정말 전라도 사람의 회사인지도 
모르면서) 다른 회사 차를 타는 젊은이도 드물지 않다. 나는 대구에 사는 동안 이런 
아이와 젊은이들을 많이 보았다. 나 역시도 예외가 아니어서 대학에 들어갈 때 
까지는 전라도 사람들이 '아무래도 좀 그럴 것' 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도 전라도 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면서 편견을 가지기로는 어른들도 마찬가지 
이다. 88고속도로가 뚫리기 전 대구와 광주는 서로 왕래가 드문 도시였다. 그래서 
전라도 사람에 대한 대구 사람들의 '혐오증'은 거의 전적으로 서울 등 객지에 
나갔다 온 사람들이 주는 정보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강원 
충청,경기도등 다른 지역에서도 다르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매우 '한국적인 특수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정한 사회경제적 환경이 조성되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생기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나는 대구를 떠난 이후에는 경상도 출신 
치고는 전라도 사람들을 많이 겪어본 편이다.대학 기숙사 식당 주방 아주머니들에서 
봉천동 고개 꼭대기 달동네 자취방 주인 아주머니, 단골로 다니던 봉천 중앙시장 
순대집 아저씨가 그랬고, 신산스러웠던 80년대를 헤쳐 나갔던 동지들 중에도 유난히 
그 동네 출신이 많았다. 당원들이 거의 백 퍼센트 전라도 출신이었던 평민당에 
들어가 관악을 지구당(신림동) 교육부장으로 일한 기간에 사귄 사람들도 많다. 

나는 전라도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내가 겪은 바로는, 다른 지방 사람들에 
비해 싹싹하고 정이 많으며,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재미있게 잘 논다. 물론 
어느 지방이나 그렇듯 개중에는 '욕심 많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고 '너그러운' 
사람과 '좋은 사람'도 있다. 특별히 어느 한쪽이 많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쪽에 속한 사람이건 하는 일이 대개 '험한 직업'이라는 사실 
이다. 예컨대 무슨무슨 부장이나 대의원 등 직함을 가지고 있거나 지구당 사무실에 
자주 나타나는 사람들을 보면 공사판 노가다,포장마차 사장,중극집 종업원,복덕방 
주인 등이 적지 않고 중고자동차 매매업을 하거나 이른바 '마치꼬바' 사장,약사 
또는 제법 번듯한 점포를 가진 상인쯤 되면 성공한 편에 속한다. 

물론 가끔은 부동산을 좀 가졌거나 작은 기업체를 경영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대학을 나와서 사무직 근로자로 일하거나 의사 등 전문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선거 
철에 특별당비 모금 구좌로 후원금을 넣기는 하지만 '김대중 당'의 지구당 사무실에 
나타나는 일이 거의 없다. 빈손을 쥐고 서울에 올라와 남들이 꺼려하는 험한 일을 
해서 먹고 살다 보니 특별히 머리가 좋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못해 자녀들 역시 생산직이나 하급 사무직 근로자,음식점 등 서비스업체 종업원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87년 대선 당시 김대중과 김영삼의 선거유세를 다 가 본 사람은 누구나 느꼈겠지만 
'양김'의 지지자들은 행색이 판이하게 다르다. 김대중 유세에 나오는 사람들은 잠바 
를 걸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옷차림뿐만 아니라 얼굴이나 손을 보아도 고생하며 
사는 흔적이 역력하다. 반면 김영삼 유세장에는, 그가 이직 야당 후보였던 시절에도 
말끔하게 넥타이를 매고 바바리를 입은 신사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전라도 사람들이 업신여김을 받는 이유를 찾으려고 '차령 이남은 지세가 배역의 
기운이 있으니 그 곳 사람은 중용하지 말라' 고 한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전혀 없다. 

'전라도 혐오증' 의 원인은 딱 하나, 전라도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돈 없고 '빽' 없고 배운 것 없이 객지에 가서 그 사회의 맨 밑바닥 일을 하는 사람 
들은, 그들이 특정 지역 출신이든 특정한 인종 집단이든 멸시를 받게 되어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70년대와 80년대의 우리나라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는 
목욕탕 때밀이,작부,깡패,도둑놈,식모,사기꾼,노가다,노점상 등은 거의 예외없이 
전라도 사투리를 했다. 시나리오 작가와 프로듀서가 전라도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실제 사회가 그랬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직업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주로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했다면 그 드라마는 '리얼리티가 없다'는 핀잔을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높으신 분들'께서 호통을 쳐서 당장 '바로' 잡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 셋 가운데 하나가 사는 수도권에서 이런 밑바닥 직업을 거의 다 
전라도 사람들이 하는데, 그들이 멸시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서울에 사는 경상도 사람들이 (다른 지역 출신도 마찬가지이지만) 보는 전라도 사람 
들은 가난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행색이 초라하고, 몇 푼 되지도 않는 돈 
가지고 악착같이 다투고, 대낮에도 술먹고 다니고..., 한마디로 말해서 함께 어울 
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향에 가서 '그런 전라도 사람' 들에 대한 
험담을 주저없이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향에 뿌리박고 사는 전라도 사람들이 
어떤지는 전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자기네가 본 전라도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가난한지를 따져보지도 않는다. 

나는 전라도 사람들의 '상대적 빈곤'이 박정희 시대에 진행된 지역적 불균등 발전의 
결과라고 본다. 아다시피 8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공장이라는 공장은 거의 모두 
수도권과 경남북에 몰려 있었다. (경남북이 전남북보다 산업 입지가 좋았기 때문이 
라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고 보지만 여기서 따지지는 않겠다.) 따라서 경기도와 
경남북의 시골 사람들은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살 수가 없는 경우에도 그렇게 멀리 
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가까운 지역 공장에서 일하다가 유사사에는 언제든 고향집 
에 갈 수 있었고, 서울까지 가는 것은 확실한 일자리가 있는 경우뿐이었다. 

다시 내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 해 보자. 우리 친척들은 친가와 외가를 막론하고 
대부분 대구와 영천,경주 일대에서 살았는데,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70년대 초번에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 많은 친척형과 누나들은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모두들 대구 
에서 공장을 다녔다. 누나들은 모두 시집을 가서 지금은 살림만 하지만 형들은 기술 
을 배워서 조그만 공장을 차리기도 했고, 그런 누나와 형들의 도움으로 공업 고등 
학교나 대학 공부를 한 내 또래 사촌들은 서울이나 수원 등지의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반면 한반도의 곡창 전라도 사람들은 60년대 후반 이후에 진행된 농업의 해체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았고 그 지역에 산업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나이 들어 간 사람들은 몸으로 때우는 궂은 일밖에 할 수가 
없었고 기초교육이라도 받은 젊은이들은 공장으로 갔다. 내가 개인적으로 충격 
받은 것은 특히 젊은 여성들의 경우였다. 

대학 신입생이던 78년 여름부터 나는 구로공단 노동 야학에서 선생노릇을 했는데, 
'호남선 완행열차를 용산역에서 내려서, 길을 건너지 않고 버스를 타면 구로공단 
행이요, 길을 건너서 타면 청량리 588' 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 그맘때였다. 야학 
학생이 약 40명 쯤 되었는데 거의 다 섬유,봉제,전자 공장에 다니는 열일곱에서 
스물 사이의 내 또래 전라도 처녀들이었다. 학생들의 신상자료에는 월 평균 급여액 
이 나와 있었는데 매주 60시간 정도 일한 대가가 2만5천원 정도였다. 당시 학교 
기숙사에 식비로 내는 돈이 월 2만1천원, 신림9동 골목의 2인 1실 하숙비가 월 3만 
5천원 이었고, 나는 고2짜리 남자아이에게 매주 여섯시간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일로 월 6만원을 버는 참이었다. 

야학 학생들의 근로시간과 월급 액수는 나에게 적지 않은 정신적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당신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노동자들과 어울리면서 비로소, 
이른바 명문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누리는 안정된 생활과 높은 지위가 불평등이 
라는 사회악에 '오염된 열매' 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 힘은 없지만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를 끝장내기 위한 싸움에 참여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이때였다. 이야기가 조금 엇길로 나갔지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서울의 전라도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전라도의 지세' 도 아니고 
'전라도 사람의 타고난 근성'도 아닌 박정희 정권의 과격한 농촌 해체 정책과 
걍상도 위주의 불균등한 산업유치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전라도 혐오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특히 경상도 사람에게는 
치료하기가 매우 어려운 정신적인 '질병'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물론 다 그런것은 
절대로 아니다) 자기네가 30년 동안 대통령을 배출했다고 자랑하면서도, 그 대통령 
들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피해를 본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 미안해 하기는 커녕 
그들을 싫어하고 업신여긴다. 

장기간에 걸쳐 반복해서,주위의 충고와 권유를 무시하면서,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 
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보통 '저 사람 제정신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른 지역사람이라면 모를까, 경상도 사람이 스스로 '전라도 혐오증' 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으면서, 또 그것을 노골적으로 내보이기까지 
한다면, 이것을 '정신병' 말고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표현이 옳지 않거나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구체적인 예 
를 몇 가지만 들어보자. 청와대를 포함해서 우리나라 정계,군부,관계,학계,재계의 
의사결정 구조 꼭대기에는 '부산 복국집'에서 '지역감정이 확 일어나야 한다' 고 
말한 전직 법무 장관과 내무관료들 같은 경상도 출신 '나으리' 들이 앉아 있다. 이 
사람들은 평소에 인사권을 행사할 때 경상도 출신을 우대해 중요한 자리에 기용하면 
서도 전라도 사람들은 '출세길' 을 막아 버린다. 

그러고는 아주 중요한 직책에 사람을 쓸 때는 '능력에 따른 인사를 하다 보니 
경상도 사람이 좀 많게 되었다' 고 주장한다. 김영삼 대통령도 집권 중반기 내각에 
전라도 출신이 거의 없는 것을 기자들이 지적하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옳은 말이다! '노른자위 보직을 여럿 거친 사람일수록 업무능력이 뛰어나다' 는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찾으면 전라도 사람이 보일 리가 없다. 원래부터 노른자위 
보직은 그 사람들에게 주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대학교에서 재단 이사장과 총장이,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전라도 
출신은 교수로 뽑지 않는다는 것을 교수 인사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면 (지금은 달라 
졌기를 바라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대학이 정말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정신병 환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육균사관학교에 입학할 때는 전라도 청년이 
경상도 청년만큼 수가 많은데, 별을 단 사람을 보면 전라도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 
가 '경상도 사람이 유전적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휘업무를 더 잘하기 
때문에 별을 많이 달았다'고 누가 말 한다면,이 사람을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언론과 국민들은, 경상도 사람이건 전라도 사람이건,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 
들이 일본 사람에게서 차별을 당하며 사는 것을 보고 매우 분개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분개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 차별에 대해서는 별로 분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민족차별 
이나 인종 차별은 나쁘지만 같은 민족 안에서 지역 차별을 하는 것은 괜찬다고 생각 
하는 것일까? 

일본사람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조센징은 더럽다'고 한다. 
그런데 식민지 주민 '조센징'이 일본 사람들이 '더랍게' 여기는 일을 하면서 
'더럽게' 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일에 부려먹을 생각이 없었다면 
그네들이 조선을 집어 삼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니까. 그들은 또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조선인 또는 한국인이 일본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자기네 
손으로 오늘날까지 여전히 막아 놓고 있다. 

'조센징'이 자기네가 '더럽다'고 여기지 않는 일은 할 수 없도록 해 놓고는 그 입으 
로 '조센징은 더럽다' 고 하는 것이다. 이런 짓을 하는 일본 사람을 제정신이 아니 
라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데 
경상도 출신의 '나으리'들은 자기네도 똑같은 짓을 하면서 자기가 정신 나간 사람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지역 사람들 역시 정신 나간 짓 그만두라고 충고 
하는 법이 별로 없다. 모두가 정신이 나간 것일까? 

전라도에도 요즘에는 공단이 생긱고 있다. 중국경제가 번창하고 서해안 고속도로가 
다 뚤리면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그 정도로는 '전라도 혐오증'이 치유될 수 
없다. 달동네에 몰려 사는 '서울 전라도 사람들'이 호화 빌라와 고급 아파트에 사는 
'서울 경상도 사람들' 만큼 잘 살게 되어야 비로서 이 질병의 '발병 원인'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문제의 본질을 덮어둔 채 막연히 '우리 모두 지역감정을 청산합시다!' 
하고 외치는 분들께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주시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런 개탄 
보다는 속마음을 열고 소근소근 조용하고 끈기있게 토론하고, 팔도의 시민들이 
저마다 다른 지역을 오가면서 그 곳의 실정과 거기 사는 사람들의 심정을 (특히 
전라도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상호교류를 지원하는 것이 당장 효과가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문제 해결에 차근차근 다가서는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라도 혐오증' 이라는 이 '집단적 정신병' 을 그 자체로서는 별로 해롭지 
않은 '지역 감정' 수준으로 완화하는 데만도 몇십 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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