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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4.1.27) 약 오후 2시 30분경 포털 다음의 인기 검색어 순위.





이거.. 뭐 해킹당하고 그런거 아니겠지?


부카니스탄 디도스 공격 그런거 아니겠지?


'다음'이 만우절 장난같은거 친거 아니겠지?




하도 신기해서 캡쳐를 떠 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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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아무리 '창조'적인 '융합'이 대세인 시대이지만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것만 같은 조합이 있다. 이를테면 게임 셧다운제와 문화 컨텐츠 산업 진흥이랄지, 어둡고 지저분한 창고같은 방에 콕 틀어박혀 일을 하는 이른바 '포토 에디터'와 몸 다치는것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훌륭한 사진을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사진 작가라던지, 아니면 이 만큼이나 다른 자장을 가진 벤 스틸러와 숀 펜이라는 두 배우의 하모니 같은것 말이다. 어떻게 벤 스틸러와 숀 펜이 같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는지 그 모습이 우선은 궁금했다. 주로 코미디 영화에 나오며 그 입지를 다져왔던 벤 스틸러와 이른바 작가주의적인 영화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온 숀 펜은 그러나 이 영화에서 딱히 그들의 노선을 벗어나는 연기를 보여주는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둘은 딱 벤 스틸러같은 월터 미티와 딱 숀 펜같은 숀 오코넬을 연기하며 다른 둘의 세상이 부닥치는 순간을 멋지게 표현해 냈다. 이 영화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LIFE)'의 목적이다.


이 짧은 글귀는 'LIFE'지가 '그 들(LIFE)'을 정의 내린 내용인데, 아무런 해본 것도 가본곳도 없는 집오리 같았던 월터가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서 세상을 누비는 철새같은 숀의 세상으로 다가가 더 넒은 세상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현실의 도전을 대신해 월터를 흥분 시키는것은 그의 지나치게 풍부한 상상력인데, 그렇게 공상에 빠져 들 수록 현실의 삶은 더욱더 위축이 될 뿐이다. 그러다 회사에서 짤리게 될 위험에 닥쳐서야 등에 떠밀려 숀의 인생의 정수를 담은 사진 한장을 얻기위해 이름도 생소한 그린란드로 떠나게 된거다. 그리고 월터는 누군가의 공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을 현실로 겪어내며 점점 더 숀의 세상에 가까워져 간다.


영화 내내 월터의 인생이 가치를 띄게 되는건 숀 오코넬이라는 대단한 사람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순간 뿐인데, 그의 '취향'에 가장 잘 들어맞는 작업 결과를 보여주는 사람이 월터 뿐이라는 평가가 내려지자 그저 어둑한 장소에 처박힌 너드에서 주관있는 장인과도 같이 보이는 화학작용을 봐도 그렇다. 점차로 월터의 인생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수 많은 '윙크'로 짐작 할 수 있는) 남들의 시선에 의해서도 긍정적이 되어가는건 그의 인생이 숀의 궤적과 닮아가는 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예민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래서 이 영화를 유럽여행 욕구를 뽐뿌질하는 최근의 대x항공 광고와 같은 선상에서 놓고 볼지도 모를 일이다. 소심하게 틀에 박힌 일상을 보내던 사람이 과감하게 시도하고 도전하며 온갖곳을 돌아다는 모습이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으니. 


그러나 영화는 조금은 의외의 지점을 목적지로 삼고 있다. 월터의 '집오리'로서의 모험이 이미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었음을, 그 집오리의 모험이 철새를 날게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월터 스스로만이 철새의 모험을 꿈꾸며 공상에 빠져 있었을 뿐, 그는 이미 소중한 동료들을 가진 훌륭한 모험가였다. 집오리의 세계에도 넘어서야 할 무수한 장애물과 벽이 있었고, 알아가고 느껴야 할 서로가 있었다. 집오리 월터는 루저도 너드도 아니었다. 단지 그 장애물과 벽앞에 주저주저하고 그저 다른 세상에 대해서만 꿈꾸었던 공상가 월터가 루저고 너드였을 뿐. 결국은 철새를 따라간 모험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월터지만 이제 그는 더이상 먼 하늘의 철새의 날갯짓만을 보고 한 숨짓는 대신 집오리로서의 모험을 두려움없이 해 나가게 될 테다. 이 영화를 보았을 많은 집 오리들이 그럴 것 처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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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이 괴작 시리즈의 정체는 뭐지? 1편에 대해서는 '새벽의 저주'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평을 했었던것 같다. 2세대 장르영화의 탄생과도 같은. 그런데 이 속편에 이르러서는 거기에서도 좀 더 나간 듯한 느낌이다. 뭔가 익숙하다 익숙하다 했더니 이건 흡사 귀여니 소설이 아닌가? 인물들은 동네의 그저 평범한 소년 소녀 들이지만 하는 행동들이나 영향력은 전국구 깡패거나 아이돌 스타와도 같이 그려졌던, 한 때의 시대의 아이콘이자 심지어 영화로도 다수 만들어 졌던 그 인터넷 소설 말이다. 그 보다 더 이전에는 슬램덩크에서 그런 정서를 찾을 수 있었다. 족히 3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고3선배들의 비주얼 하며, 전국 대회 레벨도 아닌 도내의 고등학교 선수의 레벨이 프로 선수들을 쌍싸대기 칠정도로 그려졌던 그런 정서 말이다. 이 작품들의 '만화적인 상상력'은 평범한 주인공 주위의 환경을 무림 강호로 만들어 모험의 장으로 삼았었다.


역시 전편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뼈대는 스파이더 맨에서 빌려 온 듯한 이야기다. 킥 애스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레드미스트는 킥 애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라 그를 헤칠 궁리에 몰두한다. '우연찮게' 거액의 유산도 생겼겠다 고수들에게서 무술을 전수 받아 그 목표를 이루려 하지만 그게 하루 이틀에 될리가 있나. 조금 배우다가 차라리 돈을 주고 사버리게 되는 레드미스트, 아 레드미스트였던 '머더퍽커'. 그런데 별 무리없이 엄마가 등장했다가 극에서 퇴장하고 별 감정의 동요도 없이 거액의 유산으로 사람들을 산다는것도 황당한 전개지만 여기에 더해 그 옆에서 싸움 코치 역할을 하고있는 사람이 '척 리델'이라면? 심지어 다른 역할로 척 리델이 출연한게 아니라 척 리델이라는 인물 그 자체로 출연하고 있으니 철없는 고딩의 망상이라기엔 심히 언발란스 한 묘사이질 않나.ㅎ 마치 귀여니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거기다 별 감정의 고조 없이 그저 고용하니 팀원이 되었다는 식으로 모여드는 머더퍽커의 팀은  그저 머더퍽커가 멋들어진 별명을 만들어 주는것으로 관계가 만들어지는데 가장 큰 방점을 찍게 된다. 너무 인종차별적인 이름짓기가 아니냐는 주변인의 평가가 양념처럼따라 붙을 정도로 흑인 격투가에겐 '블랙 데쓰'라는 이름을, 러시아 출신의 살상 전문가에겐 '머더 러시아'라는 위악적이고도 유치한 이름 짓기가 이어진다. 이는 힛걸에게 수련을 받으려다 계획이 틀어지자 팀을 구성하는 킥 애스 무리에 있어서도 비슷한 전개로 이어지는데 전직 마피아 였다가 종교의 힘으로 새사람이 된 군복 차림의 사내는 '슈퍼 캡틴'에 물리학 교수라는 뻥을 쳤던 사내는 '미스터 그래비티'가 된다. 그리고 그 별명에 걸 맞은 의상은 보너스. 


그런데 마치 할로윈 의상같은걸 입고서 유치한 이름을 짓고 팀을 만들어 하는 짓들이 정말로 피와 살이 튀는 살상극이니 여기서 오는 괴리가 이 영화가 가진 개성의 핵심인 것이다. 사실 다른 '진짜' 히어로 영화들의 인물도 위의 상황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손에서 발톱같은게 나오는 사람은 족재비과의 '울버린'이 되고 자기장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매그니토'가 되는 지경이니. 그런 유치한 의상과 이름을 가지고 그 인물들은 세상을 구원할 갖은 고초를 진지하게 겪게 되니 사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그 상황이란건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나 다름 없다. 한 두번의 시도가 그런 모습이었다면 나름 인정해 줄만한 요소가 있었겠지만 이제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는 영화들 중에 그런 히어로 무비가 아닌 영화를 찾기가 어려워 질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좀 더 진지하게 '보이려는' 시도마저도 식상해질 지경이다. 


오히려 히어로 무비가 가진 유치함을 정공법으로 극상까지 끌어올리자 그에 대한 풍자와 비슷한 효과가 발생한 결과물이 이 영화인거다. 글쎄 뭐 히어로 물이 그렇게 풍자의 대상씩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거기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히어로 물의 정수로 받아들일지 풍자물로서 받아들일지의 여부도 알 수 없으며 애초의 목적이 풍자였는지도 알 수는 없으나  어쨌던 신선하긴 했다. 물론 이런 시도가 3편으로 까지 이어 질 지는 장담 못하겠다. 정황상 밑밥은 깔아놓은것 같지만 2편의 흡인력은 본편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3편까지 나온다면 과연 볼 생각이 들지 잘 모르겠다. 힛걸이 또 나온다면 모르겠지만.







#1. 아놔, 쿠키 영상이 있었다네? 뭐야 이거, 검색해도 뜨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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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이름 조차도 특이한 '화이 (여진구)'는 특이하게도 아버지가 다섯이다. 그 면면은 그러나 한 대상을 다섯으로 쪼개놓은듯 단선적이다. 그리고 화이는 그 다섯 각자를 모두 아버지라 부르며 지내고 있다. 각자 형제로 칭하는 그들에게도 '형수'가 있는데 그 여인은 이 다섯 사이에서 사슬에 발목이 묶인채로 지내고 있으며 화이는 이 여인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지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들 다섯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는 여인이 혈연관계가 아님을 알고 있으며, 애초에 그렇게 지내 왔기에 별다른 저항을 겪지 않고 서로 그 관계를 인정하고 살고 있을 뿐이다. 수 많은 억압속에서 지내온 '어머니' 역시나 이제 발목을 감싸던 족쇄가 풀렸음에도 두목격인 석태(김윤석)를 남편으로, 먼 옛날 '아버지들'이 유괴해온 화이를 아들로 여기며 살고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감독인 장준환이 밝힌 바를 보자면, 돈을 받고 살인을 저지르는 석태 무리가 분재를 다루는 화원을 위장 운영하고 있다는 점은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멀쩡히 두어도 잘 자랄 식물을 인공적으로 힘을 가해 기형적인 모양으로 뒤틀리게 해 놓고 그 아름다움을 논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들은, 특히 석태는 나무를 이리저리 뒤틀어 '아름다운' 분재로 만들듯이 화이도 그렇게 아름다운 분재로 만들려고 한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자신들이 이 세상을 지내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살인 기술들을 대신에 가르친다. 정작 화이는 그림에 흥미를 가지는 여린 아이이지만 석태에게 화이의 여린 감성은 그저 쓸모없는 감상일 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화이는 자신만큼의 괴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괴물이 보인다며 두려워 하는 화이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우화와도 비슷한 이야기는 그러나 현실적인 질감을 잊지 않는 영리함을 역시 갖고 있다. 화이의 '가족'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 비현실적인 설정이 종종 잊혀질 정도로 이들의 액션 및 그 계획은 현실적이다. 마치 고대의 신화와도 비슷한 구도의 인물들이 액션마저 마법이나 경공술을 쓰는것이 아니라, 피가 뚝뚝 흐르는 고어 장르에 가깝게 구현해 보이니 이 기묘한 엇박자는 독특한 개성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지나치게 어둡다거나 잔인하다는 평을 한다. 여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종의 '하이틴 액션물'로서 관객에게 다가서기엔 많은 관객들이 당황스럽게 생각 할 수도 있다는 말인건데, 오히려 이 엇박자가 이 영화가 말하려는 핵심이 아닐까 싶다.


부모 세대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부조리마저 '세상'이라며,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알아야 한다며 자신들의 틀에 가두려하는 폭력은 신화가 신화이기 이전의 시절 부터 이어져온 반복이다. 이를 역사라하기엔 지금까지도 유효한 현상이니 차라리 그저 반복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듯 하다. '제우스'가 애저녁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 살아남은 신화가 되는 동안 부모의 이 '폭력'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남은 신화이니, 오랜 역사를 지닌 신화인 동시에 지극히도 현실의 일인 것이다. '크면 다 알게 된단다'라며 당장의 곤혹스러운 질문에 유예기간을 두는 '그 들'이지만 과연 커서 다 알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클 때까지 둔 유예기간 동안 자신과 같은 부조리를 가진 존재로 다듬어 내게 되는 것일까? 크면 다 알게 된단다라는 포장으로도 쉽게 마감처리 되지 않는 의문은 곧바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여져 본능에 가까운 분노로 표출 되곤 하는데,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앎이 과연 앎이냐 하는거다. 그건 오히려 '이렇게 알지 않고서는 넌 사람이 아니다, 혹은 다 큰게 아니다' 라는 협박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나 '부모'가 되고 나면 자식 앞에 드러난 자신의 부조리가 '세상'이 되지 않고서는 자신이 살아야 하는 근거가 없어지게 되므로, 크면 알게 된다며 벌어놓은 시간동안 자신의 세상에 알맞은 분재가 되도록 아이의 가지에 철사를 감게 되는거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비로소 한 아이의 부모는 자신의 부모에게 '이제 세상을 알겠어요'라는 고백을 하게 되면서 '크면 다 알게 된단다'라는 부모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 실현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불편하다고 하는 이면에는 잔인하게 피가 튀는 장면보다도 이런 문제제기를 하고 있기에 그런것이 아닐까? 모두가 아무런 의심없이 아이의 팔에 철사를 감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이의 팔에 철사를 감는 대신 왜 내 팔을 어그러뜨렸느냐는 항의를 내 부모에게 하지도 못하는, 마음속 깊은 곳의 원죄와 비슷한 그 무엇을 건드렸기에. 








#1. 요즘들어 여기나 저기나 개성이 있네 없네로 말들이 많지만 

     그야말로 개성이 존재의 이유가 될 만한 수작을 만나게 된 것 같다. 

    앞으로도 쭉 지구를 부탁합니다, 장감독님.


#2. 화이는 과연 괴물이 된걸까?

     괴물을 삼켜 버렸다는건 그걸 초월했다고 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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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1.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문제아들이 모인 학교의 학생들을 모아다가 합창을 시키면서 갱생을 시켜보자는 프로젝트가 있다. 이승철 팀, 엄정화 팀으로 나뉘어서 경쟁을 벌인 뒤, 이긴 팀은 폴란드 합창대회에 나간다는 일종의 당근까지 주어졌다. 그러나 쉽지 않은 아이들을 모아 놓았으니 쉽게 진행이 되지 않을것임은 자명한 일. 도중에 한 아이가 연습 시간에 빠져야겠다고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냥 연습장을 빠져나가 버린다. 코치 엄정화도 도저히 어찌 해 볼 수 없는 벽 앞에서 멘붕. 프로그램의 작가가 뒤 쫒아가 설득을 해 보다가 역시나 벽에 부딪치자 반 하소연조의 한마디를 뱉는다. "넌, 이걸(합창을) 왜 하는데?"


2. 울릉도 전지 훈련(?)을 간 합창팀. 이 들에겐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합숙훈련을 하는 동안 술과 담배가 금지되었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이제껏 들떳던 감정은 어디론가 싹 사라져버리고 동요하는 아이들. 당연한 수순으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담배 및 허용되지 않은 소지품을 걷으려 하지만 역시나 쉽게 따라 줄 아이들이 아니다. 그 와중에 한 아이가 카메라가 켜져있으니 애들이 쉽게 내놓지 못하는것 아니겠냐는 지적을 한다. 카메라를 끄라는 그 아이와, 끌 수 없다는 엄정화 코치를 비롯한 '어른들'. 왜 끄면 안되냐는 질문에는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이것(담배를 걷는 것)도 방송(촬영)이야, (카메라를 끄는 건) 안돼."



물론 3회차 분량의 방송으로 담기에 실제 촬영기간은 몇 달에 걸칠 정도로 길었고, 당연히 방송으로 나온 편집본만을 보고 가늠하기엔 보이지 않은 수 많은 맥락들이 있었을 것으로 안다. 그러나 방송 제작진의 편집의 과정을 거친 내용만을 보기에도 이 프로젝트는 적지않게 함량이 떨어져 보인다. 


위에서 든 사례만을 일단 놓고 얘기해 보자면, 일단 선 후 관계는 2번이 먼저, 1번이 그 후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두 사례에 등장하는 아이는 동일인물. 당연히 묘하게 균열이 일어나는 동일한 맥락이 보이는데, 아주 간단하게는 '권위에 대한 타협 시도와 실패' 정도로 정리 할 수 있겠다. 청소년과 담배는 절대 호응할 수 없는 개체이고 따라서 거기엔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없으므로 새 출발을 위해 모인 자리인 만큼 그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것이 당연한 수순이라는게 '어른들'의 입장이었다면, 거기에 대한 아이들의 최소한의 타협 지점이 일단 카메라를 끄고 걷자는 거였다. 종종 폭발해버리곤 하는 아이들의 반응에선 그 순간에 카메라를 끄라고 요구하는 공통된 지점이 있었는데, 이 경우에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 있었던거다. 그 속이야 아이들 스스로도 잘 몰랐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아이들이 스스로의 모습이 화면에 담긴 결과가 어떻게 될 지를 본능적으로라도 알고 있었기에 그런게 아닐까라는 짐작을 해보게 된다. 그리 무리한 짐작도 아니지 않은가. 전국 방송에 나갈 모습이 찍히고 있는데 그게 흥분해서 소리나지르고 담배나 가지고 다니는 모습이라면 세상이 그런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아이들은 그 순간을 부끄럽다던가, 그저 쪽팔리다고 느꼈을 수도, 혹 자신을 향해 쏟아질 비난에 무서웠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자신들이 하고픈대로 하고 싶다는 의지와 그럴 수 없다는 제작진의 의지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타협점을 제시했을 테지만 그건 여지없이 무시당하곤 했다. 


합창을 잘 해서 유럽에도 갈 수 있다는 당근이 아이들의 목적이라면, 그 당근을 제시한 제작진 쪽에선 그런 아이들의 인생을 담아내 감동 드라마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서로의 목적이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면 타협해 나가는게 '동업자'로서의 기본 자세일 텐데, 과연 제멋대로라고 손가락질 받는 아이들보다 제작진이 얼마나 더 나은가 싶은 생각이 든다. 과연 카메라가 켜진 상태에서 담배를 걷는 것이 아이들의 '갱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기에 그렇게나 신경전을 벌였는지가 궁금하단 소리다. 그건 갱생이나 아이들을 위한 선도의 의미라기 보다 '그림이 살아야 된다'는 자신들의 목적이 우선이었기에 쉽게 물러서지 못하는 부분이었지 않겠는가. 반복하지만 선도나 호의의 의미이기 보다 서로의 목적과 욕구가 충돌하는 지점이었음에도 왜 어른들은 당연히 아이들을 윽박지를 수 있다고 여겼던걸까? 물론 아이들의 입장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카메라를 끄고 걷었다고 마법처럼 아이들이 모두 담배를 순순히 내놓았을거라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청소년에게 담배는 안돼'라는 사회의 규율을 어겼기에 그런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대화도 없다는 식의 일방적인 자세가 아이들이 자의에 의해 담배를 내놓을 기회를 빼앗아버렸다는 부분은 제작진의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적어도 이 문제아들을 그저 배제하고 밀어냈던 어른들과는 다르게 접근하겠다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선 안되었던 거다. 


1번 사례에서도 이제 부터 진짜 진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 그날에 성형 시술 예약이 되어있다며 연습에서 미리 빠지겠다는 아이를 본다면 그 아이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거다. 나도 그랬다. 아마도 방송을 봤을 많은 사람들이 혀를 끌끌차며 아이의 인성을 탓했겠지. 하지만 방송 제작진들 마저도 그 옆에서서 혀나 끌끌차고 있어서야 될말인가? 왜 미리 잡혀있던 연습시간에 시술 날짜를 예약했는지,자신들이 왜 이 무리한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한마디도 없이 '학생이 필러를? 그것도 이 중요한 합창 연습날에?'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하고 수도 없이 타협을 시도하는 아이 앞에서 안된다는 말밖에는 못하고 있는 어른들이 엇나가는 아이보다 더 답답했다. 학생에게 필러는 전혀 필요없는 시술이라는 생각에만 매여있으니 심지어 그 핑계로 연습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빠지겠다는 아이에게 궁금한 것이라곤 '왜 필러를?' 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오히려 정해진 연습시간이 30여분 밖에는 남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완벽하게 다 준비가 끝날것이 아니다라는 이유들이라도 꾸준히 대는 아이가 더 적극적으로 소통의 의지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과연 왜 (중요하지도 않은) 필러를? 이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 한마디에 어린 나이에 잘난 외모로 밖에는 자신감을 가질 수 없는 컴플렉스가 물흐르듯이 술술 나오기라도 할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꺼냈을까? 결국엔 '너희들을 모아서 합창을 하려고 했던 우리의 의도와 너의 지금 욕구는 동시에 충족되기 어려운 것이다, 너의 욕구가 처음 합창을 하려했던 마음가짐 보다 큰 것이라면 더이상 너와 함께 할 수 없다, 진지하게 둘을 생각해 보고 그래도 결심이 바뀌지 않는다면 너와는 오늘까지다'라고 말했어야 한다. 하지만 빤히 정해진 결론을 입밖으로 내는것 조차 어른들은 아이에게 미루고 말았다. 이로서 어른들은 끝까지 아이의 손을 잡으려 안달 복달했으나, 못된 아이는 그 손을 뿌리치고 떠나버렸다는 그림이 완성 되었고.





그렇다고 아이들이 무슨 악마의 편집의 희생양쯤 되었다라고 말하려는건 아니다. 단지 솔직하지 못한 어른들 (방송 제작진)에 대해서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들 역시나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아이들의 인생에 끼어든거지만, 세상이 버린 아이들을 거두기 위해 열린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본다는 자아 도취에 빠져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결과물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기에 그렇다. 둘 사이에 의사소통이 안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기회를 걷어차는 배은망덕한 어린양으로만 접근하니 애는 쓰지만 결과물이 신통치 않을 수 밖에. 그저 합창이면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식이니 토달지 말고 무조건 어른 말씀 잘 들으면 좋은거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거라는 폭력이나 다름없어 보이고, '못된 아이들인 너네들에게 관심을 주고 있는 우리는 겁내 쿨하고 착하고 멋진 사람 뿌잉뿌잉'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 아이들의 실체를 살피는데 소흘하니 그 아이들의 행적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수 많은 아이들에 대해서도 무신경해서 일진 미화논란도 벌어지는게 아닌가 싶다. 제작진 역시나 아이들 보다 자신이 우선이었고, 그걸 인정하지 못했기에 그 아이들에게 더 다가가지 못했으며, 그 결과로 그 아이들에게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까지는 시선이 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이 프로젝트는 최종회 방송만을 남겨 두고 있다. 그 방송에서 이 부조리들이 모두 해소 된다고 하더라도 제작진의 실수가 덮어지는건 아니다. 방송 사이의 며칠 동안 '오해'는 해소되지 않고 지속될 것이며 그 사이에도 합창단과 과거 그 아이들에게 피해를 입은 아이들 모두가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제작진은 어떻게 배상할것인가? 그게 가능하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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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바나나 소송사건(Bananas!*)'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다국적 과일회사 '돌(Dole)'이 독성 농약을 사용하여 농장 노동자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을 다룬 내용이다. 일단, 난 이 작품은 보지 못했다. 내가 봤던것은 ebs였는지 kbs였는지에서 다큐멘터리 축제를 하면서 편성했던 '바나나 소송사건 그 이후(Big Boys Gone Bananas!*)'였는데 이게 참 걸작이었다. 걸작이라는 표현은 작품 자체로서도 흡인력있게 잘 만들었다고 평가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반어적인 표현으로 '참 하는 짓들이 걸~작이다~'의 의미이기도 하다. 별생각없이 만만하게 마트에서 고르던 바나나의 그 귀여운 스티커를 이다지도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붙이고 있었다니... 이 거대 기업은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낸 '바나나 소송사건'이라는 다큐영화를 이세상에서 '박멸'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해외 영화제에 이 작품을 내리도록 압력을 가하는가 하면 각국의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해 영화가 상영되는것을 막기도 한다. 물론 그 와중에 각종 소송이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것은 기본이고. 그리고 그 결과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거실 소파에 누워있던 나에게 까지 전해지질 않았는가. 거대 회사는 참패하였고, '힘없는' 소규모 다큐제작자는 이겼다. 이 '작은'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여드름을 짜내려다 자신의 손이 그 상처를 덧내는걸 인식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지. 사람들은 그저 먼나라의 농장 노동자들이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보다, 그 거대기업이 정치인과 언론을 동원하여 자신들을 핍박하고 억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자 그저 공분의 의미를 넘어서 공포로 무장하게 되었던거다. 마트에서 만만하게 바나나를 골랐던 사람들에게 두 다큐의 의미는 같지 않았다. 기업의 행태는 같았을 지언정.


본작의 이야기를 해보자. 사람들은 이 다큐의 내용을 접하기 보다 이 다큐가 세상에 나오자 이 세상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를 먼저 보고 있다.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제기되고, 기각되고, 멀티플렉스 체인점에서 조그맣게 상영이 되었다가, 돌연 취소되었다. 긍정적 현상인지 부정적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영화 이상의 의미를 벌써부터 갖게 되었다. 내용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는 외려 뒷전으로 밀려난 채로. 이제껏 보아왔던 많은 한국사회의 논쟁거리가 그래왔듯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알맹이에 대한 판단은 사라진채로 유치하지만 살벌한 힘겨루기와 소득없는 감정싸움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이래선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지만 어느 한쪽도 뭘 얻지는 못하는 소모전이 되고 말 뿐인것을. 정작 중요한 알맹이를 놓고 본다면 이게 그렇게나 흥분해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를 대하듯 할 내용은 아니란걸 알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래, 이 글에서도 이제서야 이 영화에 대해서 좀 설명할 수 있을것 같다. 가장 먼저 든 기분은 어렵지 않다는거였다. 사실 개인적으론 천안함 사건 당시엔 온갖 정보의 홍수속에서 어떤 정보를 취합해서 판단에 활용할 것인지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 그 정보들은 하나같이 물리학등의 각종 과학적인 사전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들이었고, 그래서 대체로 전문가들의 의견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사람 말이 다르고 저 사람말이 다르니 애초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로는 천안함의 조사 결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어떤 확신을 갖고 있기보다는 종교적인 믿음에 가깝게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다루는, 정말로 폭발이 있었다면 그 엄청난 열이 왜 사고 직후의 열 화상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는가와 같은 그저 간단한 논리적인 차원에서의 의문에는 어떤 과학적 사전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심지어 이해를 돕기 위해 비슷한 열로 쇠를 달구고 대형 수조의 물에 담근 후 얼마동안 그 주변의 물이 달궈진 쇠와 비슷한 정도의 온도를 띄는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건 뭐 빨간펜 첨삭지도 수준이다. 거기다 처참하게 두동강난 배가 곧바로 폭발의 증거가 되는것은 아니라는, 다른 과정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을 개연성을 풀어내는 부분에서는 일찌감치 수학포기 문과생이었던 나로서는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그 복잡한 내용이 이해가 다 되게하는 기적을 행해 보였으니.


물론 쉽다는 말은 그만큼 첨예한 부분을 많이 비켜갔다는 말일 수도 있을 테다. 실제로 천안함에 대해서 많이 들고 팠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다루지 못한 많은 쟁점들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들도 이 영화를 우선 영화로 본것이 아니라 천안함이라는 쟁점에 대해 유리한 입장에 서게 해줄 동료 정도로 판단한 측면이 크지 않을까? 영화가 한정된 시간안에 다루기엔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의 논란이 있다. 아마 그걸 다 다루면서, 이 영화 한편으로 모든 논란을 끝내리라 생각했다면 아마도 영화는 실패한 졸작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대신에 역설적으로 이렇게 '밍숭맹숭'하게 만든 영화가 온갖 영화외적인 풍파를 겪으면서 절절히 보여주는 생생한 현실이 있질 않는가. '아니... 이 정도도 안된다고?'


아마 내가 한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외국인이었다고 친다면, 이 작품을 마음놓고 흥미로워 했을 것 같다. 촌스럽게 감독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지도 않았으면서, 복잡한 사안에 대한 탐구의 과정이 어렵지 않게 펼쳐져 보였다. 거기다 영화 내에서 부터 이미 감지 되고 있었던 '자기 검열에 대한 요구'가 스크린 밖의 세상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생생하게 느껴지질 않는가. 마치 제 3세계의 농장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 및 착취가 선진국 영화제작제에게 어떤 모습으로 재현되는 지를 내가 흥미롭게 지켜봤던 것처럼, 천안함 이라는 단어로 취합되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곳이 나의 터전이 아니었다면 난 또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을. 이 흥미로운 작품을 앞에 두고 일단 비분강개하고 분노의 게이지를 한껏 올려놓아야하니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나. 이건 천안함이 폭침이냐 좌초냐의 진실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다. 천안함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는것이 아니라, 이정도의 가벼운 의심에도 전방위적인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천안함 사건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와중에 나의 가장 큰 염려는 이거다. 이긴다는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스웨덴의 '프레데릭 예르텐'이 이겼던 것처럼 한국의 '백승우'도 이길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천안함 프로젝트, 그 이후'가 나올 수 있을까? 이 암울한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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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추석 선물세트들이 돌아다닐 때가 되었다. 참치나 햄 통조림, 치약 및 샴푸나 식용유등이 명절 선물세트라는 이름으로 구성되어 매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팔려나간다. 이전처럼 먹을것이나 물품이 귀하던 시절과는 다르게 선물세트의 구성품들은 선물이라고 하기엔 이제 그 지위를 많이 잃었지만, 신기하게 많은 사람들이 저러한 물품을 '선물'로 준비하고 주고 받는다. 물론 선물로서의 지위는 잃었을 지언정 나름의 경쟁력을 갖고 있기에 여지껏 세트로 구성되어 팔려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어린 왕과 권력욕에 불타는 숙부, 천한 신분에서 최고의 권세가로 올라선 입지전적인 지략가, 반역의 무리를 막아선 당대의 실력자등등 수양대군의 이야기는 언제봐도 참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매력이 때가되면 꺼내어져 소진되니 마치 명절마다 돌아오는 선물세트를 보는 듯 하다. 그래도 예전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기억에서 잊혀질 때 쯤 다시 꺼내어지곤 했으나 요즘엔 미처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수양대군, 단종, 한명회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더구나 팩션사극이라는 외피까지 두르고 있으니 그 평범함이란게 거의 특별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근 몇년동안 사극이라는 이름을 걸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새로운 창작의 나래를 펼쳤던가. 개별 작품들의 완성도를 떠나서 이제는 팩션 사극이라는 시도자체가 애초의 새로움의 이미지를 벗어나 성의 없음에 가까운 고정관념을 주게 될 정도가 되었다. 이전처럼 먹을것 없고 물품 귀하던 시절이라면 피가되고 살이될 선물이었겠지만, 모든것이 풍족해진 지금은 유별나게 감동이 담긴 선물이 되기엔 부족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올해 나온 '수양대군 선물세트'에는 좀 색다른 구성이 포함되어 있다. 1차적으로 보면 그 유명한 단종과 수양대군의 이야기에 관상이라는 요소를 집어넣은 것일 테다. 이 고고한 역사의 큰 흐름앞에 역적 가문의 후손으로 숨어지내던 관상쟁이가 휘말리게 되는 구성이 이 영화의 히든카드 인듯 하다. 그리고 이 유명한 사건은 관상쟁이 '내경(송강호)'에 의해 관상에 따른 인과관계로 재해석되어 오묘한 분위기를 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양대군 선물세트의 존재에 대해 잘 모르는, 더구나 관상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이 작품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전 정보에 의한 진부함을 떨쳐버린 후라면 언제라도 매력적인 이야기에, 얼굴 생김새로 사건의 앞뒤를 예상하고 풀어가는 인물의 등장이라. 끌리지 않는가?


그러나 애초에 우리가 기대하게 되었던 수양대군 선물세트와 관상의 비중과 비교해 봤을 때 생각보다 무게 중심을 더 많이 두고 있는 부분은 내경과 그 아들 '진형(이종석)'의 부자간의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의 인과관계상 내경과 그 아들의 이야기가 주요하게 다루어져야만 하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저 수양대군 선물세트의 연결고리로만 생각하기엔 적지 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봤다. 그에대해서 말하기 위해선 일단 이 영화가 관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게 필요한데, 이 영화에서 관상이란 일종의 노하우와 같다. 한 인물의 성격이나 주위 환경은 얼굴 생김새와 행동 및 습관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으며, 그러니 예민하게 이를 집어 낼 수 있는 사람은 한 인물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상당히 높은 확률로 짐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다. 극속에서 관상쟁이가 내경만 있는건 아니었지만, 학습치와 경험치면에서 그 예민한 짐작을 거의 쪽집게처럼 해 낼 수 있었던것은 내경 뿐이었다. 그리고 관상을 보는 것에 대해 극도로 거부감을 느끼며, 역적 가문의 후손이라는 굴레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은채 세상에 나가고자 했던 내경의 아들 진형이 내경만큼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읽어 낼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진형은 관직에 나가면 험하게 죽을상이라며 진형이 세상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말렸던 내경이지만, 관상이나 운명을 믿지 않았던 진형에겐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픈 욕구가 들끓을 뿐이다. 


급격히 기운 가문에 낙심하여 죽을 결심을 했던 내경을 살게 했던 아들 진형, 아비가 어렸을적에 건사를 잘 못해서 아들 다리를 절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한숨짓게 만드는 아들 진형. 이 절절한 부성은 또다른 노하우를 떠올리게 한다. 온 인생을 통해서 겪어낸 노하우와 이를 바탕으로 자식에게 좋은 길을 만들어주고 픈 아비와 그 바람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들의 이야기 같은...뭐 그런거 말이다. 아비의 온갖 좌절과 아픔, 고난과 성취 같은 것들이 빚어낸 이 세상에 대한 통찰은 그러나 아직 어린 아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버겁기만 하다. 그 아비조차도 온 인생을 통해 알게 된것을 어찌 말 몇 마디로 다 이해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통찰이라는 것도 아들 세상에 와선 쓸모없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불속으로 뛰어드는 아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아비의 그 초조함이란 언제나 되풀이 되는 비극인 것이다. 그저 서서 '잘 해보거라'라며 기대섞인 응원을 보낼 수 밖에.


그러나 관상에서 시작해 절절한 부성애를 거쳐 도착하게 되는 이 영화의 '운명론'에 대한 입장은 어떻게 취하고 있는것인지가 확실하지는 않다. 한결같이 운명을 이겨 낼것이다, 그의 장담은 결국 틀렸다라던 극중의 사람들은 결국엔 관상쟁이가 예견한 운명에 맞게 그 최후를 맞게 되었다. 심지어 그 자신도 바람을 보지 못하고 그저 바람이 일으킨 파도만을 봤을 뿐이라며 자신의 '재주'를 낮추지만, 결국엔 그 바람이라는 것이 미래를 내다본 사람이라도 어쩔수 없는 정해진 운명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가장 강력한, 운명론에 대한 귀의가 아니겠는가. 물론 운명을 내다 본다고 파도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반면에 정작 그 운명은 실행되지 않았으나 그 운명론에 대한 걱정으로 가장 고통스러웠다고도 토로 하고 있지만 말이다. 


소재의 특성에 완전히 녹아들고자 했음인가;;; 마치 사주,관상을 보고 나온 양 잔뜩늘어놓은 변죽을 보고 난 뒤의 헛헛함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1. 김종서에 대한 분배(?)가 아쉽다. 

    수양에게 맞서는 실력자 김종서의 행동을 그저 선왕에 대한 충심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권력 싸움으로 봐야 할까?

    최소한의 설명이 있었다면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2. 이로서 송강호 위기론은 지층아래 화석으로 묻히게 되었음.

     개인적으론 '냄쿵민수' 보다 '내경'이 송강호의 매력을 더 잘 살린걸로 봄.


#3. 납득이의 꽈배기는 잊어라.

     송강호,조정석 콤비의 춤에는 어떤 이름이 붙게 될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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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이 영화는 감독인 닐 블롬캠프의 '디스트릭트9'의 연장선에 있다. 그 영화와 마찬가지로 구역의 분리로 빈민내지는 피지배층과 상류 시민내지는 지배층이 나뉘어 있다. 피지배층의 삶이란 지저분하고 처절하기 이를데 없고, 지배층의 삶이란 밝고 깨끗하며 여유롭다. 자신들의 밝고 깨끗하며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지배층은 사람들을 그들만의 구역안에 묶어 놓으려 한다. '디스트릭트9'에선 마치 외세의 침략자들이 원주민을 일정 구역안에 몰아넣고 온갖 나쁜 이미지를 덮어씌우며 핍박했던 모습을 외부에서 온 외계인들을 통해 재현해 보였고, 본작에 있어서는 말그대로 위성도시인 엘리시움에 사는 상류층과 그대로 오염된 지구에서 사는 하류층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보다 단순해진 묘사가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게 문제다. '디스트릭트9'에선 지배세력의 고위층의 사위로서 외계인들에 대한 핍박의 선봉에 섰던 주인공이 우연한 사고로 외계인이 되어가면서, 오히려 핍박을 가하던 시스템에 대해서 도전하게 되는 모습을 그렸다. 엇비슷한 맥락에서 그동안 온갖 나쁜 이미지들을 뒤집어 쓰면서 살아올 수 밖에 없었던 흑인들이 외계인들에 대해서 온갖 편견에 사로잡힌 분노를 쏟아내는 장면을 보여주며 일종의 전복의 쾌감같은걸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전복의 장치가 있었다면, 화면 구성에 있어서는 그렇게 새롭다고만도 할 수는 없는 뉴스화면 처럼 구성한 인터뷰의 활용을 통해 영화가 '쿨'해 보이는데 기여를 했다. 그렇게 '디스트릭트9'은 독특한 영화가 되었던거다. 


그러나 본작은 평범한 액션물이 되고 말았다. 빈민인 주인공 맥스(맷 데이먼)도, 엘리시움의 실력자 델라코트(조디 포스터)도, 살인귀 크루거(살토 코플리)도 시작부터 끝까지 쭉 다 평면적인 인물들 뿐이다. 애초에 엘리시움에만 존재하는 치료기(?)가 없으면 5일안에 목숨을 잃게 된다는 절박한 상황이 맥스를 위험한 상황에 대한 도전으로 떠밀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에서 시작해서 끝에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이라는 큰 가치를 이루게 되는 과정에서 그가 고민할 수 있는 시간 따위는 없다. 그래서 애초에 맥스가 그걸 다 인지하고 행동에 나서게 되는지, 영화 주인공 맥스를 밑바닥에서 태어나 영웅이 된 인물로 생각해도 되는지 의문이 든다. 어차피 엘리시움에 올라선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뭘 피하고 어쩌고 할 선택지 자체가 주어지지를 않는단 소리다. 그러니 그의 '희생'에 대한 감동이 반감될 수 밖에.


물론 전작과 엇비슷한 노선을 보이는 부분도 있다. 빈민가에 대한 묘사는 디스트릭트9과 엇비슷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가지는 묵직한 무게감이 있다. 빈민가 사람들의 생활은 그 흙먼지 하나 하나로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된다. 영화의 핵심인 엘리시움도 허황되거나 진부할 수 있는 함정에서 벗어나 환상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위용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일단 그 부분에 있어서 가질 법한 기대는 누구라도 다 만족할 것 같다. 거기다 말로 표현하기엔 부족한 '변태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한 신체의 훼손과 재생의 묘사는 그 자체로 큰 쾌감이었다. 그 한없이 현실적이면서도 지극히 변태적인 감성만은 아직 죽지않고 그대로 였다.


여러모로 아쉽다. 훌륭한 배우들을 데려다 놓았음에도 그들이 활약할 장은 '위성도시'만큼의 크기도 되지 않았다.[각주:1]하위층에게 주어지는 의료시스템의 문제, 잘나가는 서방과 그를 떠받치고 있는 제3세계의 구도등을 간G나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영화적인 재미가 있고 난 다음의 문제인 것을. 뻥튀기 된 자기반복이라는 평가 이상을 내리기는 힘들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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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디 포스터를 그렇게 쓰고 버리는 사람이 어디있나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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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참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한국식 b급문화의 또 다른 히트작으로 한창 떠오르는 샛별임과 동시에 어찌할 수 없는 미운털이 박혀 광고 모델로 나선 회사에 대한 불매,탈퇴 운동까지 벌어지는 크레용 팝이라는 걸그룹 말이다. 대체로 미운털이 박힌 대상이라 할지라도 어떤 성취를 보이면 그 미운털은 사그라 들게 마련이었고, 모델로 나섰다는 이유로 탈퇴운동까지 벌어질 정도의 미운털이라면 그 연예인은 대체로 자숙중이거나 숨어지내거나 해야하는 처지였질 않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너무 이른 컴백이었다' 라며. 그런데 지금 크레용 팝에 대해서는 그 두가지 현상이 모두 고조를 이루며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전무후무한 일대 사건이라 할만 하다.그렇기에 이 현상에 대해 한 두마디를 거드는 사람들 역시 많이 나타나고 있지만, 내가 느끼기엔 함량 미달의 지적질이 태반이다. 그 얘기를 하기 이전에 문제의 실체가 뭔지를 먼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에 관해서는 아래의 블로그 게시물에 자료가 모두 취합 되어 있으니 확인해 보는것이 좋을 것 같다.


<크레용팝 일베 사장 사과문...>


그러니까 큰 건더기 들은 대충,

- 팬이 헬멧 컨셉을 차용 하여 일베에 백골단 컨셉의 크레용 팝 합성 사진을 게재. 일부 팬들이 염려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으나, 사장은 오히려 '그런거 걱정하면 걸그룹 못해요' 라며 게시지를 두둔.

- '모 멤버'와 낄낄거리며 농담을 주고 받았는데, 그게 일베에만 올라온 내용이었다는 글을 사장이 트윗에 올림.

- 크레용 팝 멤버가 역시 트윗에 '노무 노무'라는 표현을 한 것과 어떤 활동 영상에 자기들끼리 '쩔뚝이 아니에요?'라는 표현을 한것이 일베에서 쓰는 표현이었다며 이슈가 됨.

-그 와중에 활동을 위한 정보 취합과 홍보를 위해 사이트에 접속했을 뿐이라는 식의 사장의 해명 글이 올라오지만 그 글에서도 다분히 감정적인 표현이 문제가 되고, 크레용 팝 멤버의 '돼지,부처'드립이 기름을 끼얹게 됨.

이정도로 정리 할 수 있겠다. 



이 논란에서 내가 가장 벙찌는 부분은 저들은 아직 '해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해명에도 불구하고 일베와 연관지어 안티짓을 하고 있다'는 식의 생각없는 지적질이 난무하고 있으니 이건 참 꼬여도 많이도 꼬인 상황 인 듯. 이건 지적질에 나서는 '네오 깨시민' 부류[각주:1]와 해명글이라고 올린 사장의 인식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들은 모두 일베라는 사이트가 가진 일말의 정치색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패착을 보이고 있다. '해명글'에서도 보면 뭘 조장하고 어느 세력에 치우치고 그런게 없으니 우릴 일베와 엮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네오 깨시민들도 일베의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보안법이 문제가 있는것처럼 저질들이 저질로 내뱉는 말 조차도 그 자유를 보장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 일베에 대한 낙인찍기가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일베가 가진 문제점중에 정치적인 색깔과 일종의 조장 같은건 오히려 후순위의 문제에 가깝다. 더 무서운건 그 기반에 깔린 배제와 어떤 대상에 대한 공격성이라고 보는데,그 정서가 유머 내지는 농담이라는 방법으로 표출되니 그걸 보고 재밌다고들 하고 있는거다. 난 간혹가다 보는 호남 지역에 대한 '7시' 내지는 '외국','여권'드립만 봐도 뺨맞고 삥뜯긴 기분이 든다. 폭도 드립이야 워낙에 역사가 오래되어서 내성이 생길 지경이고. 그런데도 그런 코드의 신조어나 농담을 재밌다면서 점점 퍼트려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 뺨맞고 삥뜯기는걸 웃으면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 분노를 놓고서 왜 애먼 걸그룹한테 정치색을 뒤집어 씌워서 두들겨 패느냐고 한다면 그걸 보고 해명이나 분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저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가장 핵심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쩔뚝이 아니에요?' 드립이라고 보는데, 가장 큰 문제는 제작자 측에선 저 말이 문제라는 인식을 하고 있지도 못했다는 부분이다. 난생 처음들어본 단어이지만 그 의미 유추에는 별 무리가 없는 '쩔뚝이'라는 단어. 아마 다리를 저는 사람에 대한 '지칭'이겠지만, 허물없는 사이에서 내뱉을 법한 욕설이라기엔 지나치게 '독창적'인 조어라는게 문제일수 있다는거다. 물론 그 독창성 역시나 독창적인 인물이 그저 우연하게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표현이라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그 표현이 특정 대상에대한 비하,모욕의 표현이라는 문제는 남는다. 쉽게 말해 저들은 일베에서 쓰는지 몰랐어요라고 일관하고 있지만 일베어던 아니던 아주 저질의 욕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다. 저 영상의 촬영 주체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애를 가지고 놀리는욕설이 선명하게 영상에 담겼는데 공개 될때까지 거쳐갔을 수많은 사람들 모두 저 표현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던 점은 일베 논란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 않을까? 거기다 사장의 해명에 의하면 그저 활동을 위한 정보를 얻기위해 일베를 이용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트윗에 남긴 모 멤버와의 일화엔 일베의 코드에 낄낄거리며 '거기 재밌지?'라는 말을 했다고 하질 않나. 그런데도 비난 여론을 '그저 접속 했다는 이유로' 까대는 사람이라고 몰아대며 마녀 사냥 할거라면 달게 받겠다니...ㄷㄷ


제작사 측의 실수라면 비난 여론이 단지 일베와의 연관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일베가 갖고있는 안좋은 특성(특정 대상에 대한 악의적인 배제와 괴롭힘)을 고스란히 즐기고 있다는 점에 대해 문제라고 여기고 있는걸 파악하지 못한 부분일 테다. 네오 깨시민류의 실수라면 이 문제가 그저 일베에 대한 두드러기 반응이 아니라 일베식의 정서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김을 드러낸 것에 대한 반응이자 크레용 팝 측이 해명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감정싸움을 벌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아우르지 못한 부분일 테고. 





Canon | Canon EOS 5D Mark III | Manual | Spot | 1/125sec | F/10.0 | 0.00 EV | 60.0mm | ISO-100 | Off Compulsory | 2013:06:05 19:07:12






그리고 이 글을 작성하고 있던 와중에 크레용 팝 제작자측의 '공식 입장'이 기사로 떴는데, 


크레용팝 "일베·표절 루머 사실무근..오해죄송"(전문)


먼저 든 생각은 일베에서 시작한 논란이 참 많이도 갔구나 하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표절에 대한 부분은 미운털 연예인이 흔하게 뒤집어 쓰게 되는 모욕이 가수의 경우엔 표절에 관련된 것이라 그렇게 크게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이 공식 입장이 이 사태에서 빠져나오기엔 적지 않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우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침묵조차도 의사 표현이라는 거다. 이슈가 처음 불거지기 시작한지가 얼마나 됐는데, 표절에 음원 사재기에 출생의 비밀에 해명 글에 채워넣을 논란의 내용이 불어나기를 기다렸던 건지 이제서야 정식으로 된 해명을 하고 있으니 뭐가 그렇게 재고 따질 일이 많았던건지가 궁금해 질 수 밖에.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버리면 그 반성의 기미라는 것도 반감되어 전달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더구나 그렇게 재고 따진 이후에도 그 해명이란게 그렇게 촘촘한것 같지는 않다. 일베에 실린 내용에 대해 낄낄거리며 '거기 재밌지?'란 대화를 주고 받았다는 '모 멤버'가 크레용 팝 멤버가 아니라는 말이 해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그 사이트가 재밌다고 낄낄거리며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돈데, 그런 사람을 그저 접속하고 정보만 얻은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나요? 이건 사람을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말의 앞뒤가 맞고 안맞고의 문제인거지 말입니다;;;


사실 난 이전의 '전효성 민주화' 사건 때도 글을 남긴적이 있다. 그 때엔 지금과는 다르게 전효성 측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논란이 생기고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서 그것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각주:2] 그 해명이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는 각자의 판단에 달린 것이고, 적어도 소속사와 해당 연예인이 할 수 있는 차원에 있어서는 (심지어는 좀 오버한거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할 도리를 다 했기에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인정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던거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번 사태는 일베의 '정서'에 대한 판단 문제에서 시작해서, 소속사 측의 비난여론에 대한 감정 싸움의 문제로 크기를 키우더니, 판세를 읽는 시야의 부족이라는 능력의 한계로 그 지구력을 확보한 모양새가 되었다. 크레용 팝의 소속사 쪽에선 연예인이라고 문제만 생기면 납작 엎드려서 빌어야 하는건가, 더 납작 엎드리지 않았다고 이러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중요한건 어느 지점에 대해서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지를 그들이 아직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사태가 적지않은 시일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네오 깨시민 부류는 자신들 만큼 쿨하게 일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리돌림'하면서 꼭 크레용 팝에 대해서 한다리 씩 걸쳐 놓겠지. 아니, 소속사가 엉뚱한데서 더듬거린게 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핵심이라구요 이사람들아. 















  1. 깨시민=니들과는 다르다, 니들과는. 네오 깨시민=깨시민과는 다르다, 깨시민과는. [본문으로]
  2. '전효성 민주화'와 비교하기엔 벌려놓은게 좀 많긴 많긴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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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아마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 특공대 같은 팀이 꾸려졌던 모양이다. 영화는 지구로 향하는 혜성에 대응하기 위해 나섰던 그 팀이 '실패' 했다는 라디오 뉴스로 부터 시작한다. 인류는 더이상의 생존에 실패하게 된거다. 남은 시간은 21일, 그 뒤로는 모든게 다 끝이다. 그렇게 되자 이제 전인류는 공통의 관심사 하나에 몰두하게 된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생각보다 모든 룰이나 법규가 모두 무시되는 아비규환의 난장판은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나, 일단 영화의 시선에 들어온 부류는 '될대로 되라' 족. 솔로로 죽을 순 없으니 되는대로 짝을 지어주려던 친구에다, 술김에 주인공 도지(스티브 카렐)에게 딥 키스를 날리는 그 친구의 부인. 난생 처음 술을 홀짝거리는 꼬맹이에다, 미워하던 사람에게 찾아가 속시원하게 욕을 해주겠다는 사람까지. 심지어는 날마다 파트너를 바꿔서 즐기고 있다는 한 너드는 이제 여자들이 피임이며 자신의 외모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행복해 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 도지는 그저 집에서 조용히 최후를 맞을 생각이었다. 어느 우연한 사고를 겪기 전에는.


우연히 만난 옆집 여자 페니 (키이라 나이틀리)와 길을 떠나게 된, 아니 어쩌다 보니 폭동의 무리를 피해 같이 길을 떠나게 된 도지다. 일단 떠나고 난 후,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함께하기로 한 둘. 사실은 페니에게 비행기를 타고 가족에게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게 먼저였으나 비행기까지 가기 전에 차의 기름이 바닥났으니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 이어지는 진행은 기대에 크게 벗어남이 없는 밝고 유쾌한 죽음 맞이하기이다. 온갖 오해와 갈등으로 괴로웠던 관계들이 회복되고 두려움 없이 서로에게 다가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이차이도, 외모도, 돈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사람과 사람이라는 순수한 이유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사랑할 이유가 된다. 


공원에 사는 개이름, 'SORRY'라지요~♬

                      


 이 영화와 조셉 고든-래빗 주연의 '50/50'을 같이 놓고 보는건 그리 무리한 시도는 아닐테다. 그 영화에선 주인공이 50% 생존률의 난치병에 걸린 후,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게 되는가를 다루게 되는데 이건 마치 전 세계인을 시한부 난치병 환자로 만든 스케일이 아닌가 말이다. [각주:1]  두 이야기 모두 비로소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사용하는 이야기들이지만, 거꾸로 그건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여성들이 너드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던건 그저 작당해서 너드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구 종말이 다가오자 기회가 늘어난건 그 계산이 필요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었고. 만약 거짓말 같이 종말에서 비껴난다고 해서 그 기회가 종말을 앞둔 때와 같이 주어지게 될까? 다시 기회가 없던 시절의 너드로 돌아가게 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특수한 상황에서 감정의 고조를 겪는 사람들의 화해와 사랑은 아름답고도 슬프지만 그건 특수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삶을 살아갈 사람들에게는 별로 도움될게 없는 이야기다. 영화 '스피드'에서 산드라 블럭이 그러지 않던가, 극적인 상황에서 만난 인연과는 사랑에 빠지는게 아니라고.


굳이 모두가 다 죽고 말거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서 이 사람도 소중하고 저 존재도 소중하니 모두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일종의 협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이런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난 후에는 늦으니 잃기 전에 행동하세요' 같은. 그건 삶의 수많은 평범한 상황들을 볼모로 잡아버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만약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겠다는 일념으로만 삶의 순간들을 겪어 낸다면 그 삶은 어떻게 될까? 심지어는 그러고도 놓친 소중한 사람이 존재 할 수 밖에 없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을 그저 내탓으로만 돌리고 그저 견뎌내라는 말은 성취될 수도 없는 목표거니와 건강한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도 장애물일 뿐이다.  갈등이 있다면 욕하고 싸울수도, 안보고 살수도 있어야 한다. 죽고 죽이는것보다는, 이 관계에서 쌓인 울분을 다른 관계에다 푸는것 보다는 나으니까. 안보고 사는것에 대한 괴로움이 편안함 보다 크다면 그 사람이 한발짝더 다가서면 그뿐, 왜 다른이의 협박에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염려하며 지금의 내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걸까? 


사람의 성격과 마찬가지로 관계도 기승전결과 엇비슷한 흐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관계의 가장 행복한 순간만을 대표 이미지로 떠올리지만 어떤 관계라도 그 관계가 이유가 되는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건 상대와 나의 노력의 여부와는 별도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평생을 아름답게 사랑하고 짝을 먼저 떠나보내게 된다면 그 아름다웠던 사랑도 절망의 이유가 되는거다. 이 사례라면 아름답게 사랑했던 시절도, 짝을 떠나보내 절망하게 되는 시절도 모두 그 관계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웠던 그 시절만을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봐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절망과 괴로움과 후회도 모두 나름대로의 지분이 있는 감정들이며 어느정도는 모두 필요한 것들이다. 어떻게 발악을 해도 결국은 따라 붙고 말 감정들이고. 


물론 지구가 작살날 시간이 21일 쯤 남았다면 또 모르겠다. 그 때라면 나도 내안의 간디를 이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러기 전에는 보기 싫은 사람 안보고 하기 싫은 말은 안하고 맘에 안드는 사람과는 싸우면서 살고 싶다, 되도록이면. 그리고 배 곯고 난 후 음식이 당기듯이, 관계가 주는 괴로움보다 행복감이 더 당기게 되는 때가 오면 뒤도 안돌아 보고 그 관계를 향해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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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영화의 감독이 50/50의 감독이 아니었나 싶었지만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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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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