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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자신의 호언장담대로 세계를 깜 놀 하게 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에 대해서 기존의 인식과 상반된 평가를 내렸었다. '기술 수준은 좋은데 체력이 문제다'라는. 물론 언론 및 상대편을 자유자재로 쥐고 흔드는 특유의 화법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발휘된 사례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양발 쓰기’의 효용은 일견 고개를 끄덕이게도 하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알려진 대로 한국은 혼연일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온 나라가 월드컵경기에 매달리다 시피 해서 다시 이루기 힘들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고, ‘일류 감독’ 히딩크는 한국의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일류 감독의 입에서 기술 수준이 좋다는 평가를 이끌어 내게 했던 한국 선수들의 일반적인 양발 쓰기는 그 동안 많은 한국 축구팬들로부터 ‘2류, 3류’로 구분되었던  한국 지도자들의 조련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이다. 왜 한국의 감독들은 그저 학연, 지연에 매달려 선수들의 잠재력을 이끌어 내지 못하느냐는 비판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르지만 히딩크 조차도 그 ‘2류,3류’ 감독들의 비효율적인 지도 방법으로 인한 일종의 성과를 기반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제야 나름대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파악한 한도 내에서 ‘공부의 신’은 못된 드라마다.(물론 ‘못된’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못된 ‘드라마’이기도 하다.) 미리 밝히자면 나는 일본 원작 만화는 물론 원작 드라마도 보지 않았고, 한국판 드라마의 초반 설정과 한참 설왕설래가 이루어 졌던 여러 글들로 이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전체 맥락을 다 파악하지 못했다는 반박이 있다 해도 어느 정도는 타당한 지적이 될 테다.)내가 가지고 있는 드라마에 대한 정보는, 이 드라마의 줄거리의 근간을 이루는 ‘룰이 마음에 안 들면 룰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김수로의 일갈과, 고깃집 장사에 매달려 공부에 별 의욕이 없었던 오봉구와 그 부모 정도다. 그래서 이어질 글에도 이 부분에 대한 내 생각을 밝혀 볼까 한다.



                                                               물론 얘가 나오는거 까진 안다...

 

 ‘룰을 만드는 사람’ 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 단언컨대 인류 역사에 있어서 룰을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라면 달라질 수 도 있겠지만. 제 아무리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왕이라고 하더라도 신하들이 자신의 말을 듣도록 하기위해서는 끊임없이 위세를 떨쳐보여야 했고,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켜야만 했다. 그렇게 귀족들이 동의 할 만큼의 규칙이 받아들여지고, 그 규칙이 피통치자들에게 동의를 얻을 만큼이 되고, 또 그 규칙이 계급사회의 가장 밑바닥의 천한 사람들에게까지 받아들여지면, 그것이 곧 규칙이 되었고 그 시대가 되었다. 왕의 횡포가 그 아래의 귀족들에게 동의 받을 만큼의 선을 넘는다면 귀족들에게 왕이 죽임을 당했고, 왕과 귀족들의 횡포가 그들을 먹여 살릴 세금을 납부하는 피통치자들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면 반란으로 왕과 귀족의 목이 달아났고, 도무지 견디기 힘든 핍박이 이어져서 천한 노예들조차도 스스로의 처지를 동의해주지 못할 정도가 되면 그 처지를 벗어나도록 동의를 얻을 만큼 왕 이며,귀족 이며,시민들을 위협했다. 물론 이름은 세종대왕으로, 히틀러로 남았지만 훈민정음의 창제는 많은 학자들의 노고가 깃들여진 결과였고, 나치의 만행은 그 룰을 만들어 휘두르도록 높은 자리에 ‘미치광이’를 오르게 방관한 독일인의 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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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룰을 만드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눈다? 그래서 룰을 만들 수 있는 위치에서 룰을 만든다? 그 때 만드는 룰이라는 것은 이미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적선이지, 피부에 와 닿는 규칙이 아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룰을 만드는 1류 들의 대열에 낀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할 3류 들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 1류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1류 대열에 어떻게 던 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룰을 만드는 1류가 되는 것에 실패한 열패감으로 그저 개인의 안위에만 만족하며 사느라 자신과는 무관한 1류의 설교를 들어주지 않을것이다. 더구나 스스로 1류가 되었는데 과거 자신이 속했던 3류 인간을 위한 룰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3류로 치이는 사람들을 위한 룰을 만들기 위해 1류가 되어라? 너무 낭만적 인거 아닌가? 

 

 모두들 오로지 1류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1류에 대해서만 말한다. 마치 1류 들만이 살고 있는 세상 같다. 3류로 사는 방법 따윈 가르치지 않는다. 1류가 아닌 이상 3류는 그 존재조차도 인정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왜 봉구네 부모는 그저 사람 좋은 웃음에 천치에 가깝게 그려지는가? 그 정도 크기의 가게에 손님이 바글바글할 정도로 운영을 하자면, 그 이전에 특별한 맛을 내기 위해 얼마간의 수련 및 연구가 필요 했을 것이며, 가게운영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서 어떤 계획을 세워서 실행해 나갔을 것이며, 경쟁 업소를 견제해 가며, 사람을 효과적으로 부리기 위해 궁리를 해가며, 각종 파동에 대처해 가며, 어떤 몸부림을 쳐 왔을 것인가. 그러나 드라마는 봉구 부모의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고작’ 고깃집을 위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에. 1류를 위한 노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허허거리는 웃음에 먹는 거 좋아하고 성실하게 일 잘하면 그 나이 정도에 그 정도 고깃집은 거저 주어지는 양 그려진다. 평생 노력이며 몸부림 이라는 걸 쳐 본 일이 없는 양 그려진다. 그래서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봉구가 지금껏 목표도 없이 의욕도 없이 되는 대로 살게 되었노라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봉구가 목표도 없이 의욕도 없이 되는 대로 살아 왔다면, 그건 아마도 그의 부모의 삶이 ‘거세되는’ 경험을 이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도무지 인정을 못 받는 거지. 누군가의 재단에 의해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잘하고 열심히 일구어온 분야는, 그래서 내가 그 뒤를 따르면 어렵지 않게 그 이상 성취할 수 있는 분야는 
자꾸만 다른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거든. 나의 존재 그대로를 발전시켜 나가면 그 순간 나는 바로 인정 못 받는 3류가 되는 세상. 결국 1류(곧, 사람답게 인정받을 수 있는 부류)가 되기 위해 내가 잘 못하는, 맞지 않는 그 길을 따라가야 만 한다. 그러나 그 길에는 내가 고깃집에 친숙하듯 공부에 취미가 있고, 자질이 있고, 유리한 환경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다. 내가 그들을 따라 잡으려면 그들이 포기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시작도 하기 전에 다리에 힘이 빠진다...

 
 

 강석호 변호사 같은 부류의 사람이, 3류가 룰을 만드는데 어떻게 뛰어들어야 하는지 따위는 관심 없이 그저 룰 앞에 자기의 이름을 새기기 위해 남들 위에 딛고 서는 것이 룰을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을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이, 봉구를 의욕 상실의 지진아로 만들었던 것이다. 남은 음식을 재활용하는 것이 들춰내기 조차 꺼려지는 공공연한 비밀이 된 것은, 원산지를 속여 놓고도 먹고 살려고 그랬을 뿐 이라는 어딘가 당당하게 까지 보이는 항변을 늘어놓게 된 것은 그 들에게서 룰에 참여 할 권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안위가 최선일 뿐, 남을 위한 의무 따위는 어디 잘난 1류 들이나 한가롭게 따지는 거라고 체득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앞장선 1류와 똑같은 발언권을 쥐어 줘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3류 에게도 그만큼의 권리를, 그 들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자신의 ‘비교적 하찮은’ 삶 속에서도 하찮지 만은 않은 생각을 하도록 ‘가르쳐야’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 논리로 수학을 가르치고, 감성으로 문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적어도 당당하게 ‘수학은 암기 과목이에요’ 같은 말을 내뱉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3류’ 로 위치 지어진 스스로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그들이 자발적으로 룰을 만드는 노력에 참여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 ‘3류’들을 비웃기 전에 돌아보아야 할 1류 그 자신들의 얼굴에 묻은 똥이 너무나 더럽다.




 

여기에 무터킨터 님의 블로그에서 접한 한 독일 백수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54세의 이 독일인 백수는 1974년 이후 36년 동안 전혀 노동을 하지 않은 채로 사회 보장 혜택을 통해 시에서 총 5억원 정도를 지급 받았다. 독일 사회에서도 특이한 사례로 간주되어 토크쇼 출연, 음반 취입 등을 통해 ‘일하는 사람이 바보’라는 자신의 메시지를 설파하고 다닌다. 한국에서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 사례이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아르노 듀벨 씨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처럼 자신의 일생을 초지일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 왔다는 점이 말이다. 누군가는 나라의 복지 정책이 너무 과도해 놀고먹는 일이 뭐 대단한 일이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채로 살아 왔다. 반려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기르고 , 좋은 집에 좋은 차를 타고, 돈을 모아 여행을 다니고, 나름의 명성을 얻어 존경어린 시선도 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어김없이 자신의 신념을 선택했다. 여성과 사귀고 싶은, 아이를 갖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을 때, 그 욕망이 신념을 넘어 섰다면 그의 노동 경험 제로의 타이틀은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그렇다고 실패자로 숨어 지내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애견과 산책도 하고, 이웃의 친구와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떳떳하게 노동을 하지 않는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 그 점이 그를 더 대단하다고 느끼게 한다. 남들의 시선과 구분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36년간 노동경험이 제로지만 범죄 기록도(소개된 글에서는 특별한 소개가 없으니) 제로다. 듀벨씨는 자신의 신념을 힘 있게 끝까지 유지해 유명세라는 것을 타게 되었다. 그를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게 만드는 지점은 자기 자신을 포기한 채 남들의 시선을 따라, 욕망을 따라 삶을 영위해 나가다가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 서버리게 되는 불상사를 전혀 겪지 않았다는 부분일 테다.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 왔고 그에 따르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 해 온 자세가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독일에서는, 이런 삶도 가능하다.




 

 

 

 

 

 

 

 

 


참고 해본 포스팅.
 
공부의 신, 입시지옥 조장론 동의 못하는 이유 - 박형준

공신, 잘못 태어난 막장 드라마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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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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